[행복한책읽기] 돼지는 복덩이 월스트리트도 덕 봤다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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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돼지 관련 이야기 총망라
돼지의 발견

새러 래스 지음, 김지선 옮김, 뿌리와이파리, 156쪽, 2만5000원

돼지해에 맞춰 나온 '돼지백과사전'. '깔끔하고 똑똑한 돼지의 문화사'란 부제를 달고 돼지와 관련된 동서고금의 역사를 고루 짚었다.

돼지에 대한 세간의 인식은 모순된다. '돼지 멱따는 소리''돼지 목에 진주목걸이'등으로 폄하하면서도, 고사상에는 돼지머리를 올리고 돼지꿈은 좋아라 한다.이런 이중성은 꽤 역사가 길다. 고대 이집트에서 돼지는 더럽다는 이유로 미움을 샀다. 돼지를 만진 사람은 그 옷을 그대로 걸친 채 강물로 들어가 흔적을 씻어내야 했다. 돼지 젖을 마시면 문둥병에 걸린다는 믿음도 있었다. 신약성서의 '거라사 돼지'사건(미치광이에게 붙어있던 귀신이 예수의 명령에 따라 근처 돼지떼로 옮아갔다)은 돼지의 이미지가 '악'으로 굳어진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하지만 돼지는 풍요와 다산의 상징 노릇도 동시에 해왔다. 라트비아에서는 파종기에 풍작을 기원하며 돼지에게 경배를 드렸고, 아일랜드에서는 돼지우리를 세 바퀴 돌면 병이 낫는다는 미신을 믿었다. 그 이면엔 돼지의 왕성한 번식력이 있다. 생후 1년이 넘은 암퇘지는 매년 두차례 8~12마리씩 새끼를 낳는다. 계산상으로 암퇘지 한마리가 10세대 만에 650만 마리로 불어나는 것이다.

돼지에 얽힌 재미난 이야기도 많다. 세계 금융의 중심가 '월스트리트'는 돼지 덕에 생긴 이름이다. 1653년 맨해튼 주민들은 돼지떼의 난입을 막기 위해 로어 맨해튼 북쪽 경계에 벽(Wall)을 세웠고, 벽을 따라 거리가 형성되면서 '월 스트리트'라는 이름이 붙었다. 대통령 후보로 언급된 돼지도 있다. 1968년 미국 시카고에서 열린 베트남전 반전 집회에서 사회운동가 애비 호프만은 읍내에 있는 돼지 한 마리에 '피가수스'라는 이름을 붙여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쓰임새도 다양하다. 고기와 가죽을 남길 뿐 아니라 접착제.왁스.부동액.살충제 등의 재료도 된다. 돼지의 심장 판막이 인간에게 이식되기도 했다. 하지만 소.닭.개 등 다른 가축과 달리 돼지는 죽기 전에는 별 효용이 없다. 그래서 영화 '꼬마돼지 베이브'의 감독 조지 밀러의 말이 퍽 숭고하게 들린다. "돼지에게는 비극적인 색채가 있다. 오랜 세월 오직 고기만을 위해 키워졌는데도 아직까지 영리함을 잃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나는 두 손을 들었다. 그들은 언젠가는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우리 모두에 대한 은유다."

이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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