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지성] 흑산도 앞바다서 펼친 실학사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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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헌신적인 고대의 모방자가 근대의 가장 새로운 스승이다"라는 카시오도루스의 격언을 이 책에 바친다. 묻혀 있던 손암 정약전(丁若銓.1760~1816)의 삶과 그가 쓴 국내 첫 생물학 서적 '현산어보(玆山魚譜)'를 31살 현직 생물교사가 섬세한 인문학의 그물로 건져 올렸다. 꼼꼼한 현장답사와 광범위한 문헌 고증을 통해 한국 박물학의 계보를 다시 쓴 이 책은 지난해 1~3권이 출간됐을 때 유례없는 해양문화답사기로 관심을 끌었다. "선조의 실용과학정신을 되살리는 데 이만한 수고는 일도 아니다"는 저자는 이번에 4.5권까지 완간하면서 8년여 여정을 끝냈다.

손암은 다산 정약용의 형으로서 걸출한 박물학적 지식을 지녔음에도 당국의 천주교 탄압에 16년을 흑산도에 유배돼 살았던 인물이다. 그는 이 기간에 근해의 동식물을 채집.조사해 2백여 종의 특징.분포.식용여부 등을 기록했다. 흔히 '자산어보'로 알려진 이 해양생물백과사전에 저자는 세세한 문헌 대조를 거쳐 '현산어보'란 이름을 되돌려준다.

신간을 읽는 것은 한편으로 난세의 선각자 손암의 발자취를 좇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 한반도 연안 동식물과 펄펄 뛰는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저자는 흑산도 답사의 여정을 르포식으로 기록하면서 섬 주민들과 나눈 대화와 고문헌을 끊임없이 몽타주한다.

밀물 썰물의 원리를 천착하거나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증명하려 한 손암의 집념 근저에 실용후생의 정신이 놓여 있음은 물론이다. 저자는 손암의 분류법이 서양의 분류법에 비해 허술한 것은 인정하지만 그것이 생물의 위계를 따지지 않는 문화의 특성일 수 있다고 지적하는 등 객관적 시각을 잃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 책을 읽는 재미는 손암이 분류한 학명을 오늘날의 실제 생물과 대차대조하는 퍼즐 게임에 있다. '화절육'이란 학명으로 기록된 꽃제륙이 실은 새치류라는 걸 확인하는 사례에서 보듯 저자의 끈기는 형사 콜롬보 못지않다. 조물주에게 대들던 황소가 밟혀 노랑가오리가 됐다는 등 각 종(種)과 관련된 민담을 채록한 것도 이 책의 또 다른 수확이다. 특히 답사 도중 '송정사의(松政私議)'를 발굴해 조선 후기 소나무 정책의 실태와 손암의 민본사상을 확인한 것은 값진 개가가 아닐 수 없다.

강혜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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