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과 40년 우정/전육(중앙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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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금년초부터 청와대에 의해 추진되어 오던 노태우 대통령과 전두환 전대통령간의 화해노력이 사실상 무산된듯 하다.
최근 양측 참모들은 두사람간의 입장차이와 오해의 폭이 워낙 깊어 이미 제3자가 개입해 풀릴 성질의 것이 아님을 확인,모두 두손을 들고 말았다.
이 때문에 노대통령 재임중 노­전 두사람이 만날 가능성은 거의 없어보이며 오히려 두사람은 피차 섭섭한 감정을 더해가고 있어 현재대로나마 관계가 지속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것이 양측 측근들의 지배적인 관찰이다.
왜냐하면 한쪽은 5공청산이 지나치게 과장되고 잘못설정된 것임을 공개적으로 시인·사과하라는 것이고 다른 한쪽은 이미 국민의 심판이 끝난일을 현직 대통령이 원칙과 위신을 잃고 뒤집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확고한 입장을 취하기 때문이다.
○깊어지는 감정의 골
물론 이같은 주장의 배경에는 40년 우정을 바탕으로 대통령직이란 최고권력을 인수인계한 두사람만의 특수한 경험과 애증이 작용하고 있다.
연희동쪽은 시간이 갈수록 노대통령이 전임자에게 인간적인 배신을 했을뿐 아니라 5공청산엔 6공의 조급한 위상정립과 관련된 정치적 음모가 작용했다고 믿고있다. 이를테면 전씨 부부의 백담사행,친·인척의 대거구속,청문회를 통한 5공의 명예실추 과정에는 분명 보복의 측면이 있었고 그것을 유도한 수단이 비열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전씨와 그 주변은 이같은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신고의 사례들에 관해 차츰 입을 열기 시작했다. 전씨를 만난 사람들의 전언에 의하면 그는 백담사에 「유배」되어 있는동안 당국으로부터 국내외 재산에 대한 철저한 정밀조사를 받았으며 미국에 유학중인 자녀들의 예금구좌까지 추적당했다고 한다.
또 전씨 자신을 외국에 보내기위한 조직적인 「공작」이 있었고 백담사행,국회증언,친·인척의 사법처리 과정에서 청와대가 누차 위약을 했다는 주장이다.
그뿐아니다. 백담사를 허가없이 방문한 전·현직 고위관리,군인 등이 권력으로부터 유·무형의 압력을 받은 사례,심지어 이순자 여사의 단골 양장점 주인이 당한 세무조사 사례까지 울분의 대상으로 토로한다.
과거의 정적이었다면 몰라도 40년 친구요,혁명동지이며,게다가 대통령직을 넘겨준 사람에게 이럴 수 있느냐는 것이 전씨측 의리론의 핵심이다. 작년말 노대통령이 소련 방문에 앞서 백담사로 전화를 걸었을때 전씨는 이렇게 한을 토한적이 있다고 한다.
『한뿌리의 두가지인 6공과 5공이 어떻게 단절될 수 있는가. 당신도 대통령 자리를 물러난 먼훗날 내가 자식에게 노태우는 배신하지 않았다고 말하게 해달라.』
그러나 청와대는 전씨의 최근 언동이 상식적으로 용납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고 있으며 발상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비판한다. 우선 온세상이 다 알다시피 5공청산이 6공정부의 정보흘리기 작전에 의해 조장되었다는 확신이 얼마나 비현실적이며 터무니 없는 것이냐는 점이다.
5공문제의 근본원인은 여소야대의 정치구도,민주화의 대세,친·인척 비리 등 5공이 갖고있던 본질적 취약점이 상승작용을 해 일어난 역사청산의 과정이지,결코 전·후임 대통령간의 파워게임일 수 없다는 것이 청와대측의 시각이다.
오히려 청와대는 노대통령이 태풍속에서 전씨 하나만이라도 보호하기 위해 취한 노력을 평가하지 않고 무조건 배신했다는 등 험구로 몰아붙이고 있는데 대해 불쾌감을 느끼고 있다.
○관계개선 기대 난망
백담사 생활의 고통과 불행은 가슴아프게 생각하나 그런 과정없이 전씨가 연희동에 무사히 귀환하기는 어려웠던 저간의 사정을 이해해줄 수는 없겠느냐는 생각이다.
그래서 청와대는 걸프전,미국 국빈방문을 전후해 자연스럽게 두사람이 만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화해를 모색하려 했다. 그러나 연희동측은 뒤로 미안하다고 말하거나 겉으로 사이좋게 지내는 척하는 것은 이제 가치없는 일이며 화해를 하려면 먼저 공개사과부터 하라고 버티고 있다.
이 때문에 청와대의 감정도 나빠졌다. 선공후사를 누구보다 이해해야할 연희동측이 마치 「상왕」의 입장에서 요구하고 6·29와 노대통령의 탄생을 자기의 「작품」으로 착각하는한 관계개선은 진전이 있기 어렵다는 자세다.
양자간의 이같은 관계는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은 사납고,인생은 냉엄하며,권력은 무상하다는 느낌을 준다. 해방후 처음 경험한 평화적 정권교체의 뒤끝이 시정말직의 전·후임 갈등이나 마찬가지라면 우리의 정치적 성숙은 아직도 요원하지 않느냐고 걱정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물러난 사람은 유배되어 절치부심의 한에 빠지고 권력을 쥔 사람은 제도변경(내각제)을 해서라도 사후보장을 꾀하지 않고는 안된다면 우리의 정치는 권력의 저열한 속성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권력의 저열한 속성
말할 것도 없이 지도자의 금도란 백성에게 도움되지 않은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첫째다. 최고지도자들이 천하를 포용할만한 도량으로 미담을 남기진 못할지언정 국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은 차라리 비극에 가깝다.
더욱이 두사람간의 40년 우정은 온국민이 다 안다. 때문에 두사람의 관계정리는 보다 더 윤리적이고 교육적이어야 하리라 본다. 냉엄한 정치가 우정을 짓밟고 권력은 투쟁과 갈등 그 자체라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것으로만 끝나고 말 것인가.
아니면 대통령직은 제도의 보장아래 성실히 수행하면 그만이고 퇴임후는 역사적 평가나 기다리는 전통을 이제라도 세울 것인지,노­전 두사람은 국민과 더불어 고민해야할 것이다.<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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