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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형렬『속리! 속리!』 하창수 『담배와 창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2면

작가가 작품을 쓴다는 것은 누구를 위해서인가. 독자를 위해서라는 것이 고전적 견해일 터다. 독자가 작품을 읽는 것은 그것을 오락으로 즐기기 위함이라든가, 유익한 정보 얻기라든가, 감동을
받고자 함이 원칙인 까닭이다.
그러나 이러한 종래의 습속이 크게 허물어져가고 있다. 물론 이러한 현상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90년대에 이르러 좀 더 견고하게 이 점이 노출되어 우리의 눈을 끈다. 독자를 안중에도두지 않는 작품, 그러니까 작가가 자기만의 이야기를 고통스럽게 토해 놓은 글쓰기가 그것이다. 문형렬씨의「속리! 속리!」(『문학사상』8월호)가 그런 유형의 한가지다.
이 작품의 주인공이자 작중 화자인 <나>는 37세. 현직 모 신문사 문화부 종교담당기자. <나>는 지금 속리산 법주사를 가고 있다. 목적은 김복진이 제작한 미륵불 복장 유물의 행방을 찾기 위해서다. 여기까지 이르는 동안 <나>는 숨쉴 틈없이 37년간의 자기의 지난날을 자조적으로 읊어대고 있다.
이 고백체란 하도 숨가쁜것이어서 만일 누가 중단이라도 시킨다면 금방 폭발해<나>와 <나> 주변 전체를 잿더미로 만들 기세다. 이 숨막히는 현재형이란 실상 하나하나가 모두 느낌표로 환원되는 것. 그런데 이<나>란 누구인가. 바로 이물음이 결정적인데, <나>란 다름아닌 작가인 것이다. 작가의 자질을 가졌고 신춘문예 당선까지 된 <나>이기에 장가도 제법 잘 갔고 대학원도, 선생 노릇도 그럭저럭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허영 때문에 <나>는 결국 작가되기를 포기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 천추의 한을 가슴 속에 묻고 37세까지 살아온 사나이의 광량한 내면이 그야말로 폭발 직전에 있지 않겠는가.
작가 문씨에겐 독자 따위란 안중에도 없다. 그는 그자신을 구출키 위해 글을 썼을 뿐이다. 아직도 소실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속리산이 그를 구출해줄 턱이 없는데도 그는 몸부림치고 있다. 애처롭고도 안타까운 일이아닐 수 없다.
작가가 자기만의 이야기를 고통스럽게 토해놓는 글쓰기의 또다른 유형이 하창수의 「담배와 창문」(『문학사상』8월호)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가령… 창문이 있는 어떤 방을 생각해 봅시다」라는 화두모양의 명제를 불쑥 내밀어 놓고 시작하고있다. 이런 당돌한 가정법이 겨냥한 것은 무엇일까. 가정법을 어디까지나 가정법에 묵어두기가 그것이다. 설명도, 묘사도 거부하는 가정법자체를 음미함이란 결국 인식론의 함정에 스스로 빠져가는 것이 아닐까. 가정법명제의 음미란 이성중심주의(주체적행위)인 만큼 경험의영역에서 아득히 벗어난 자리가 이닐 수 없다.
그렇다면 이 가정법에 매달려 있는 주인공은 누구인가. 이 물음이 중요한데, 곧37세의 소설가인 것이다. 그런데 이 소설가는 소설(묘사)대신 인식론을 필치고 있다. 소설을 읽고자 하는 독자에게 철학을 안기고 있는 형국이 아니겠는가. 독자란 안중에도 없다.
대체 이러한 현상은 무엇을 가리킴일까. 문득 우리는 헤겔을 떠올린다. 소실이 잡스러운 것이지만 그래도 생존하려면 철학에 접근해야한다고 했다.
지금 우리 소설계는 소설이 아예 철학(비평)이 되어버리려는 극단적 경향이 생겨났다. 이 반동으로 소설이 당당무계한 공상(사이비정학, 도술, 공상소설 나부랭이)으로 치닫는 현상이 생겨나고 있다. 이 한가운데에 비평이 분리되어 시로부터, 소설로부터 독립된 성채를 구축하고 있다. 90년대스런 징후일까. 김윤식<문학평론가·서울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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