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할린에 부는 『명자…』바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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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지난 23일낮 사할린주 수도 유즈노사할린스크시내 레닌동상앞광장.
약15m 높이의 크레인에 올라탄 이장호감독이 힘차게 『레디 고』를 외쳤다.
사할린동포들의 통한의 과거를 담을 『명자·아키코·소냐』가 크랭크인된 현장.
이곳에는 한맺힌 주름이 굵게 팬 동포1세들과 철부지 4세들이 함께 모여있어 기자의 비감을 자아냈다.
약간의 과장이 허용된다면 지금 사할린에는『명자·아키코·소냐』의 바람이 불고있다.
사할린이 생긴 이래 최대규모의, 그것도 한국인에겐 처절을 극한 한이 서린 이땅에서 한국인들이 한국영화를 찍고있는 것이다.
현지 한글신문인 『새고려신문』은 말할 것도 없고 사할린TV방송국을 비롯한 현지매스컴들도 이 영화작업에 지대한 관심을 표해왔다.
표도로브 사할린주지사등 소련관리들도 영화규모에 압도당한 표정이었다.
특히 표도로브 주지사는 24일 한국동포가 운영하는 공원식당에서 열린 리셉션에서 이 영화촬영을 『한소 문화교류의 차원에서, 그리고 불행했던 두나라간의 과거를 진무하는 작업으로 받아들인다』고 밝히고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한국동포들은 한국제작진보다더 들떠있다.
모국에서 실어온, 그들의 눈으로 볼땐 엄청난 물량을 동포들은 마치 자신의 것인양 하며 긍지에 차 있다.
안내원·통역원으로 스태프에 참여한 이정자씨(45·동포2세·충남부여 고향)는 『서울에 가보지는 못했지만 휴지 한장까지도 서울에서 온 것이라 생각하니 함부로 쓸 수 없다』며 바쁘게 움직이는 모국사람들이 『사랑스럽다』고 했다.
이씨의 사랑이란 표현은 모국에 대한 습기차고도 끈적이는 그리움이 밴 진짜 사랑이었다.
그녀처럼 동포들은 현실적으로 제작진을 돕고 있다. 7순의 임중한씨(경부문경 출생)는 자신의 낡은 소련제자가용으로 스태프들을 안내하느라 신바람이 났고 사할린주 정부 한국인담당관인 이무형씨(50·함남함흥 고향)도 무뚝뚝한 표정 속 깊이 주정부 베이스의 지원을 이끌어내는데 자신의 「파워」를 십분활용하고 있다.
그리고 유즈노사할린스크시거주 8천 동포중 거리에서 만난 동포들은 하나같이 『명자…』의 촬영사실을 알고 있었고 뿌듯한 기분을 거침없이 토했다.
25일 있은 자유바자르(식품·꽃시장) 촬영장에서 만난 손익선군(23·동포3세·서울고향)은 아버지가 서울을 방문해 찍은 사진을 수첩에서 꺼내 보여주며 반가워했고 신바람이 나 촬영현장을 끝까지 지키기도 했다.
제작사인 지미필름은 한국에서 배로 2차례, 비행기로 2차례등 모두 4차례에 걸쳐 촬영에 필요한물건을 실어날랐다.
여기에는 일본으로부터 올 소도구및 의상 4.5t과 홍콩에서 반입한 촬영기자재 1.5t도 포함돼있다.
현지한국인 고용을 합해 1백여 제작진 유즈노 사할린스크시내 방60개짜리 건물의 방40개를 세내 쓰고있다.
아파트로 지었다가 유스호스텔식으로 개조돼 운영되는 이건물에는 공중전화조차 한대 없었고 『명자…』팀이 도착 4일만에 신청후 10년이 걸린다는 시내전화를 가설하자 오히려 건물관리인들이 눈이 휘둥그레기기도 했다.
25일 촬영팀은 오전엔 자유시장에서 오후엔 유즈노사할린스크공동묘역에서 촬영을 진행했다.
앞으로는 일제하 징용의 현장인 비행장건설·브이코탄광작업·철도건설등과 56년 있었던 동포들의 귀국요구데모장면등 큰규모의 촬영이 포함돼있고 이영화의 최대장면인 일제의 한인방기·일본인귀국촬영이 코르사코프항구에서 10일께 있게된다.
5일간 매일 2천여명의 엑스트라를 동원하는 이 장면을 찍기위해 제작진은 현지동포를 비롯해 약1천명의 소련군인을 동원할 계획이다.
이감독은 『한국인의 끈질긴 생명력에 초점을 맞춘 멜러드라마로 연출하겠다』고 밝히고 한국인의 한이 서린 사할린 땅을 한국인의 개척정신의 승리라는 시각에서 영화를 만들고싶다』고 말했다.
사할린 현장에는 영화제작과 함께 『사할린 동포들, 그들은 누구인가』라는 3시간짜리 다큐멘 터리가 만들어지고 있다. <사할린=이헌익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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