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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중독증 누가 치료하나/최철주(중앙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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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다시 국치일을 맞으며
서울의 어엿한 대학에서 한국 현대사를 전공한 대학생이 동경으로 유학길을 떠났다. 우리나라 역사를 연구하기 위해 어째서 일본까지 가야 하느냐고 친구들이 물었다.
그는 친구들을 설득시킬 적절한 답변을 찾지 못해 쩔쩔맸다. 그러다가 이윽고 하는 말이 『거기에 모든 것이 다 있어. 내지로 가는 심정이야』라고 고백했다. 일제시대 조선학생들이 「종주국 일본」을 가리키며 마지못해 썼던 내지라는 단어를 입에 올렸다.
○반일과 친일의 혼재
그는 역사를 공부하기 위해 서울의 주요 도서관을 뒤적거릴때마다 결국 서고에 꽉꽉 들어찬 일본 문헌에 압도돼왔다. 3공,5공의 「대일 종속적」외교 정책을 비판해 왔던 그는 제 나라 역사 자료를 일본에서 구해야 하는 현실에 자존심이 무너졌다. 29일이 국치일이라는걸 기억하는 사람은 결코 많지 않다. 「일본」이야기만 하면 열을 내는 사람들조차 그렇다.
8·15를 전후해 우리들은 일본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을 했다. 과거 역사에 대한 왜곡이 여전하고 세계질서의 재편을 계기로 일본의 힘과 돈의 위력이 더욱 커졌으며 목청도 높아졌다고 경계했다.
그러나 정작 일본에 있어 한국은 무엇인가를 따지는일에 소홀했다. 우리를 좀더 멀리 떼어 관찰하는데 인색하고 채찍도 아끼고 있다. 「일본문제」와 관련해 감히 우리 자신을 비판한다면 오직 부끄러운 일이며 그걸 건드려서는 안되는 것일까. 우리들은 어떤 문제들을 안고 있는가.
첫째,사고는 대일종속적이지 않은가. 우리는 일본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면서도 스스로 일본을 닮아가고 있다. 반일과 친일의 감정이 혼재된채 일본과의 동질성을 추구한다. 일본에서 오줌마시기 치료법에 관한 화제가 몇달후 한국에서는 『요료법으로 만병이 치료된다』는 것으로 턱없이 증폭된다.
일본사람도 마시니 우리도 마셔보자고 꾀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동경 여성들 사이에 긴머리형이 유행한다 싶으면 곧 서울에 상륙한다. 한국 라면에 일본식 이름이 붙고 한국 TV의 인기 스포츠 게임이나 그 진행방법은 아예 일본프로그램을 옮겨 놓았다. 사회자의 제스처도 일본 냄새를 풍긴다.
경제환경 변화에 따른 새로운 법률제정은 예외없이 일본법이 1차 참고 자료가 된다.
그러나 「참고」정도를 넘어 숫제 그대로 옮겨놓다시피한 법안도 적잖이 국회를 통과했다. 작년에 만든 금융산업전환 및 합병에 관한 법률 등은 그런예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많은 법률과 정책들이 일본에서 「수입」됐으며 시대가 바뀌고 환경이 달라져도 일본식 사고와 모방의 내용은 커져만 간다.
○심각한 대일정보종속
둘째,정보의 대일종속은 얼마나 심각한가. 「모든 정보는 일본으로 통한다」는 어느 관리의 토로는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다. 공무원·교수·과학자·기술자·기자·농어민후계자,하다못해 교통안전협회 요원들마저 자료를 얻기위해 동경으로 몰린다.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는 사람은 힌트를 얻기위해 일본 유행의 거리에 자리를 잡는다.
일본 도서관에는 정다산론에서부터 박철언론에 이르기까지,1930년대 모월모일모시 부산을 떠나 경성(서울)에 도착한 열차의 승객수와 기관사 이름에서부터 90년 현재 강원도 시골역의 현황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기록이 보존되어 있고 또 수많은 과학정보 자료도 갖추고 있다. 창사25주년을 맞은 한국의 어느 기업이 사사자료가 없어 합작 파트너인 일본 기업에 도움을 요청하는 희극도 다반사로 일어난다.
한일 관계는 사실상 정보관계로 발전했다. 산업화시대에는 기술이전에 관심이 모여졌으나 이제는 기술을 포함한 정보 싸움에 누가 이기느냐,또는 좇아만 가느냐로 국운과 사운이 달라지게 됐다. 세계 12번째 교역국이면서 아직 노벨상수상자 한명내지 못하는 우리의 처지는 그저 일본만 흉내내고 따라가다 거기에 만족하는 일본중독증 현상을 보이고 있는게 아닌가.
신문·방송·출판의 하드웨어는 물론이거니와 소프트웨어도 사실상 일본의 영향권아래 있다. 우리실력을 보여주겠다는 93년 대전세계박람회는 주요 정보·기술부문에서 일본에 크게 의존하고 있으며 이러다가 일본잔치판이 되지않을까 걱정이 태산이다.
셋째,언어의 대일종속은 어떤가. 한글을 애용하자는 사람은 많으나 새로운 우리말을 만들어주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사회과학·자연과학 용어의 태반이 일본식 한자어에서 빌려온 것이다. 민족주의를 부르짖는 대학생들의 학생회관 옆에 「고정신고센터」간판이 붙어있고 이제는 「전향적」이라는 일본단어가 국어사전에까지 올랐다.
일본인의 감각·감성이 들어간 어휘를 우리 대통령,우리 외교관조차 거리낌없이 쓸 정도로 언어의 일본화 현상이 뚜렷하다.
과학기술정보와 데이타베이스 구축을 위한 각종 용어의 통일 및 표준화 작업도 일본어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중·고·대학에서 일본시험문제가 번역출제되고 일본식 답변을 요구한다. 우리는 일본인인가,한국인인가,아직도 식민지 시대인가
○확립해야할 우리위상
일본식 국가주도형 발전모델을 받아들인 우리 경제는 여전히 대일종속적일까. 결코 아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다고 할 수 밖에 없는 묘한 입장에 있다. 역사적 갈등속에서 나타나고 있는 일본화 현상은 대일종속적인 그림자로 투영되고 있다. 스스로의 길을 개척하는 일은 어렵기는해도 우리 자신의 정체를 확립하는 것이 국제사회에서의 한 주역으로 발돋움하는 바탕마련의 유일한 길이다.<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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