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사고와 시민(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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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파리의 자동차치고 앞뒤가 성한 차가 드물다. 거의 예외없이 찌그러져 있다. 한줄로 촘촘히 주차해 놓은 자동차를 빼내려면 천상 앞차와 뒤차를 적당히 박치기해 밀어내야 한다. 운전자끼리 암묵간에 양해하는 일이다.
주차때만이 아니다. 주행중에 일어난 단순접촉사고도 운전자끼리 합의하면 그만이다. 보험에만 들어 있으면 문제될 것도,시비할 것도 없다. 선진국 대부분의 나라들이 그렇다. 일본만 가도 그런 일은 당연한 상식이다.
그것은 우선 시민의 편의를 위해서 좋고,경찰의 일을 덜어 줄수도 있다. 또한 민주시민의 자질을 높이는 의미도 있다. 우리나라도 그동안 마이카시대 답게 그런 교통사고는 운전자들의 합의에 맡겨 놓았었다.
바로 그 법률조항이 요즘 도로교통법 개정안 입법예고 과정에서 지워진 모양이다. 법무부와 교통부가 한 일이다.
필경 이런 부서의 나리쯤되면 경찰서에 불려다닐 일이 없는 모양이다. 그나마 공직자는 경찰서에 가 목이라도 세우고 큰 기침도 할 수 있지만 연줄없는 시민은 경찰서에 들어만 가도 기가 죽고 불안하다.
이제 운전자들끼리의 합의제가 없어지면 단순접촉사고를 일으킨 운전자들은 일일이 형사입건의 절차를 밟기 위해 경찰관 앞에 쭈그리고 앉아 조서를 써야 할 것이다. 도둑 하나 제대로 못잡는 경찰서는 귀찮고 짜증나는 일거리를 무더기로 껴안게 되었다. 필경 그 짜증과 귀찮음이 시민에게 그대로 전가될 것은 너무도 뻔한 일이다.
글쎄,이런 일을 왜 당국은 고집하는지 모르겠다. 교통행정 공무원의 음성수입 증대를 위한 특별조치라면 또 몰라도 그렇지 않고는 시민들이 싫어하고 귀찮아하는 일을 굳이 밀고 나갈 이유가 없다.
밀인즉슨 두가지다. 하나는 지금의 보험제도가 물렁해 피해자의 불이익이 걱정이고,교통질서를 바로 잡는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단순 논리다. 보험제도가 물렁하면 그것을 단단하게 바로 잡으면 된다. 그런 노력은 밀어두고 엉뚱하게 편리하고 잘 돼있는 제도를 불편하게 고치려는 의도는 설득력이 없다.
단순접촉사고라는 것도 합의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에 따른 손해배상도 징벌은 징벌이다. 그것만으로도 교통사고 예방의 의미는 충분히 있다.
당국은 부질없는 일로 시민의 원성이나 살 일을 괜히 하나 더 보태지 말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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