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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위한 기여입학제인가(권영빈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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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6·25전쟁이 집과 재산과 희망을 빼앗아 간 폐허의 자리에는 신분·재산·가문에 따른 불평등도 함께 사라졌다. 모두가 똑같은 추위와 가난을 맞아야 했다. 암담했던 폐허위에서 유일한 희망이란 자식의 교육뿐이었고 명문교·명문대학이 장래의 삶을 밝히는 등불이고 가문을 일으키는 신분상승의 새로운 지름길이라고 확신했다.
교육에 대한 우리사회의 선택은 이런 맥락에서 출발했고 어쩔 수 없었던 그 선택은 70년대의 고도경제성장 정책과 맞물려 상호보완적 기능을 충실히 했다고 본다. 확대일로의 경제정책과 지칠줄 모르는 교육열은 오늘의 성공을 뒷받침한 두 기둥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뒷문입학 청강생 우골탑 등으로 표현되었던 당시 사학의 무성했던 부정 학사 운영에도 불구하고 그 모두가 오늘의 경제발전을 이루는 초석이 되었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공정한 입시는 규범
때문에 이 사회의 교육열과 대학입시라는 제도는 다른 나라의 어떤 유형에도 속하지 않을 우리 사회의 독특한 삶의 기준이고 그나마 이 사회를 유지해온 정신적 지주며 사회적 기강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대학입시의 공정성은 병역의무의 형평성과 함께 이 사회를 지탱하는 공정과 형평의 마지막 보루인 것이다. 단순히 교육기회의 공정성이라는 의미를 훨씬 능가하는 이 사회의 도덕성과 정의감으로 이어지는 총체적 사회공정성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대학입시부정 사건이 터질때마다 국민적 울분과 분노로 확산되는 까닭도 학사관리의 차원이 아닌 사회적 정의감으로 그 사건을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부금이든,기여입학이든 공정성을 상실한 대학입학제란 총체적 사회공정성을 무너뜨리고 이 사회의 도덕성과 가치관을 전도시키는 치명적 계기가 된다고 생각한다. 대학재정의 일시적 호전은 예상할 수 있지만 총체적 사회기강의 붕괴는 무엇으로 막을 것인가를 생각해본 사람이 과연 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이 점이 기부금입학제를 반대하는 첫번째 이유가 된다.
의미있는 경쟁으로서의 교육열이란 고무하고 격려할 일이지 결코 매도할 일이 아니다. 교육을 향한 끝없는 열정을 교육체계가 어떻게 수용하고 발전시키느냐에 따라 교육열은 국가발전의 추진력이 될수도 있고 국력을 낭비하고 쓸모없는 고학력자만 양산하는 망국의 사회풍조가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교육열을 의미있는 교육경쟁으로 승화시키면서 국가발전의 원동력으로 삼는 길은 무엇인가. 시대가 요구하고 사회가 요청하는 가치관에 따라 교육체계가 재정립되어야 한다.
70년대 고도성장기까지만 해도 뜨거운 교육열에 의한 교육체계는 그런대로 성공적이었다. 할일은 많고 쓸만한 인력은 달리는 때였다. 비록 암기식 교육이지만 대충 교육받고 대학졸업하면 제앞을 꾸려나갈 수 있었고 일의 내용도 대충 그런 수준이었다.
그러나 80년대를 넘기고 2000년대를 앞둔 지금에 와서까지 교육의 내용이 이럴 수 있느냐는 반성이 심각하게 일고 있고 교육의 위기론이 대두하고 있는 시점에 와있다.
○교육의 위기론 대두
잘 살아 보자는 근대화논리와 이를 뒷받침한 교육열과 교육체계가 70년대의 국민적 선택이었다면 지금 우리는 민주화와 산업화가 국민적 공감대로 자리잡고 있는 사회에 살고 있다. 교육체계와 정책이란 시대가 요구하는 인력을 가르치고 배출해야 한다.
민주화에 맞는 사고력·비판력을 키우는 시민교육이 학교교육에서 실시되어야하고 산업화에 걸맞은 창의력과 과학성을 높이는 교육이 실시되어야 할 것이다. 교육체계와 정책의 전면적 전환이 이뤄져야 할 화급한 시점에 우리는 놓여있고 이를 위한 몇가지 대안과 긍정적 분위기가 자리잡아 가고 있는 오늘이기도 하다.
두가지 수치상의 명백한 변화조짐이 그 좋은 예다. 그 첫째가 지난 4년동안 3만7천여명씩 증가하던 대학지원율이 금년 2만명 감소라는 숫자로 나타났고 대졸자 취업률이 55%임에 비해 전문대 취업률이 87%라는 놀라운 성장을 했다는 사실이다.
이 수치는 무작정 대학진학이라는 종래의 관행에서 벗어나려는 자의·타의의 새로운 변화가 교육에 대한 기대가치속에서 일고 있다는 증좌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종래 학력위주의 의식에서 능력위주로의 의식전환이 기업의 인사관리에서부터 서서히 일기 시작했다는 사실도 중대한 변화로 꼽을 수 있다. 게다가 실업고 지원율의 급격한 상승과 진로교육에 따른 취업반의 성공적 운영도 학벌보다 기술과 능력에 따른 자기발전의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음을 뜻한다.
산업에 필요한 인력의 배출과 수급이 어느때보다 절실한 때이고 고도의 기술과 전문성이 나라의 장래를 결정하는 초미의 관심사가 된 오늘이다. 그러나 아직도 기업현장에는 젊은 일손이 달려 기계를 멈춰야 할 판인데도 30여만명의 청소년들이 오로지 대학에 가기 위해 학원과 거리를 방황하고 있다.
산업화에 긴요한 과학·직업·기술교육이 어느때보다 절실함을 모두가 알고 있으면서도 낡은 암기식 인문교육에 힘을 낭비하고 있다. 산업화·과학화가 사회적 가치관으로,교육체계의 핵심으로 자리잡아 나가야 할 때인데도 대학에 가야 인간답게 살 수 있다는 70년대의 낡은 교육관행이 아직도 궤도수정을 하지 않은채 맹목적 질주를 할 뿐이다. 여기에 한술 더떠 기여·기부를 통해 대학으로 가는 길을 더 넓혀 놓는다면 그나마 꺼져가는 구시대 관행의 질주에 기폭제를 달아주는 격이 될 것이다.
○민주·산업화에 역행
기여입학제란 민주화·산업화·과학화의 시대적 요청을 역행하면서 다시금 대학이 신분과 지체의 상징물로 인식되던 구시대의 가치관과 교육체계를 부활하는 쪽으로 기능할 것이 명백하기 때문에 기부금입학제를 반대하는 두번째 이유가 된다.
물질적 기여든,정신적 기여든 기여입학제란 사회적 공정성을 무너뜨리고 새 시대의 교육체계와는 역행하는 의미없는 교육경쟁체제를 강화하는 두가지 중대한 역기능을 담당할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에 도입되어서도,다시는 거론되어서도 안될 제도인 것이다.<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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