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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과학자 어울려 『통일』노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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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연길=신종오 특파원】중국 길림성 연길시에서 열리고 있는 「91한민족 과학기술대회」에서 45년 전 각각 남과 묵을 선택했던 두 젊은이가 이역 중국 땅에서 백발의 원로과학자가 돼 극적으로 만나 통일의 노래를 합창했다. 남북한 및 재중국 동포과학자들이 해방 후 처음으로 한데 모인 이 대회 첫날인 20일 오후 분과발표를 끝내고 만찬장으로 향하던 박기채 전 고려대교수(7l·화학)와 김성희 함흥화학 공대교수(69)는 백산호텔 1층 로비에서 45년만에 처음으로 절친했던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부둥켜안았다.
개막식 때 학술대회 발표자 이름을 보고 설마 했던 두 사람은 만찬장 입구에서 우연히 마주쳐 서로를 알아보고 『니 기채 아니가』,『성희 맞지』를 외치며 얼싸안은 채 눈물을 참지 못했다.
43년 경성제대 이공학부에 진학, 깊은 우정을 쌓았던 동기 동창생인 이들 중 김성희 교수는 46년 4월 서울 영등포의 한 화학계열 공장에 취직했고 박 교수는 부산 수산대 강사로 나선 후 생사조차 모르며 지낸 지 45년만의 해후였다.
이 두 사람은 무더위 속에 세시간 가량 진행된 만찬회동안 내내 어깨동무를 한 채 둘러싼 후배 과학자들의 축하를 받으며 남북으로 흩어진 친구와 지난 일들을 이야기했다.
두 사람의 은사이자 북한 화학공업의 아버지로 불리는 세계적인 화학자 이승기 박사의 근황에 대해 김 교수가 이야기하자 박 교수는 반색하며 스승에게 꼭 자신의 인사를 전해달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경성제대 동기동창 중 현재 북한에는 최승규 씨(함흥화학 공업대학)가 생존해 있다고 전했다.
이들이 앉은 백산호텔 1층 만찬장 5번 테이블에는 이들의 또 다른 동기동창인 장세환 전 서울대 교수가 곁에 있었고, 고려대 교수이자 전 화학회장인 김태린 박사와 함흥화학공대 과학부장 겸 조선과학기술 총연맹 산하 화학공업협회 부회장 김형락 박사, 함흥화학공대 유기화학 공학부 강좌장 백원암 박사, 길림성 연변 토산공사 야생동물 양식실험장장인 진덕수 씨 등이 모여 추억의 꽃을 피웠다. 김 교수와 박 교수는 이야기 도중 서로 자신의 키가 크다고 의자에서 일어나 등을 돌리고 키를 재기도 했다. 박 교수가 1cm 정도 컸다.
이들은 「조선민족의 우수한 두뇌와 통일에 대해 열변을 토하기도 했는데 연변가무단의 노래 등 여흥이 무르익자 김 교수와 박 교수는 장세환 씨 등과 함께 3백여 명이 모인 만찬회의 무대에 나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목청껏 불러 모든 참석자들이 일어나 따라 부르기도 했다.
이들의 만남이 알려지자 조완규 전 서울대 총장 등이 5번 테이블로 다가와 축하인사를 하기도 했다.
또 이날 환영만찬장에서는 미국에서 온 채수봉 박사(52·미국 남플로리다 뉴칼리지대 자연과학부장·수학)가 국민학교 동창여학생인 연길시의 무용인 이녹순 씨(52)를 43년만에 극적으로 해후, 주위의 축하와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채 박사와 이 씨는 중국 길림성 화령현 신동소학교 한 반에 다니다 채 박사 가족이 48년 북한으로 이주하면서 헤어졌다가 이날 다시 만난 것.
이 씨는 중국무용가협회 이사이면서 연길시 조선족예술단 명예단장을 맡고 있는 원로 무용인으로 이날 두 소꿉친구는 서로 얼싸안고 『아리랑』을 함께 부르며 춤을 추기도.
채 박사는 또 이날 5촌 당숙인 채준 씨(도문 철도분국당학교 교장)를 역시 43년만에 만나는 행운이 겹쳐 주위의 부러움을 샀다.
이번 과학기술 학술대회는 첫날 개막식에 남북의 과학기술자뿐만 아니라 중국내 조선족과학자들이 대거 참석해 식장인 연변예술극장이 1천3백 명의 참석자들로 발디딜 틈이 없을 만큼 붐벼 남북과학기술자의 첫 만남에 대해 큰 관심을 보였다.
중국 내에서 참가한 2백63명의 조선족 과학기술자 가운데는 서쪽으로는 신강에서부터 동쪽으로는 혹룡강성에서 온 동포들까지 다양했으며 중국 전체 30개성에서 가운데 14개성에서 조선족 과학기술자들이 참여했다.
첫날 개막식에서도 우리쪽 정조영 과총 회장직무대행이 평양과 서울을 번갈아 가며 내년부터 과학기술대회를 열자고 제의한데 대해 북한쪽 허병진 과학기술총연팽 부위원장은 『탁구에서 단일팀을 구성한 것처럼 과학자도 단합해 통일을 앞당기자』며 긍정적으로 답변해 남북과학자대회의 정기화에 밝은 전망을 던져주었다.
특히 첫날저녁 개막축하만찬에서는 연변조선족 가무단의 주도로 「도라지」등의 춤과 노래가 펼쳐졌는데 폐막식 때나 나올 것으로 예상됐던 『우리의 소원은 통일』노래가 나와 남북과학자들이 손을 잡고 따라 부르는 등 분위기가 처음부터 고조됐다.
개막식과 분과별 토론회 등 빡빡하게 짜인 대회 첫날 공식일정을 마친 남북한 및 해외동포 과학기술자들은 20일 오후 6시 백산호텔 연회장에서 열린 환영 리셉션에 참석, 격의없는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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