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선 '고성불패 떼법' 활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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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28일 서울 종로경찰서 종로지구대에서 취객 허모(70)씨가 경찰관의 얼굴을 손으로 때리고 있다. 이 장면은 지구대 안에 설치된 폐쇄회로(CC) TV에 찍혔다. [서울지방경찰청 제공]

"경찰 ××들아, 빨리 안 집어넣고 뭐 해. 한통속 아냐."

"야 이 ××놈아. 입 닥치고 가만있어라."

2일 오후 11시 서울 영등포경찰서 중앙지구대(옛 중앙 파출소). 욕설과 발길질이 난무하는 '활극'이 벌어졌다. 주연은 소주에 절어 인사불성이 된 취객 두 명이었고 경찰은 조연이었다. 술을 마시다 우연히 시비가 붙은 이모(34)씨와 박모(52)씨는 주먹다짐을 하다 지구대로 연행돼 왔다. 그러나 긴장하는 기색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지구대에서도 서로 멱살을 잡고 구르며 이종격투기를 방불케 하는 육박전을 벌였다. 경찰 세 명이 달라붙어 겨우 떨어뜨렸지만 그 뒤에도 사무실이 떠나갈 정도로 고함을 지르며 욕설을 주고받았다. 경찰이 "여기가 당신들 안방이냐. 조용히 좀 하라"고 주의를 줬지만 들은 체도 않았다. 이 지구대 백승욱(53) 경위는 "경찰이 취객에게 감정적으로 맞대응하면 일만 커지는 까닭에 조용히 달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취재진은 같은 날 서울 시내 다섯 곳의 지구대를 찾았다. 모두 심야 취객으로 난리통이었다. 지구대 근무자들은 "매일 벌어지는 일"이라며 대단치 않다는 듯 말했다. 시민의 치안을 돌봐야 할 지구대가 밤만 되면 본래의 기능을 상실한 채 '취객 보호소'로 전락한 지 오래다.

오전 1시 방배서 남태령 지구대. 언뜻 보기에도 만취 상태인 30대 남자가 술냄새를 풍기며 지구대에 들어왔다. 그는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 횡설수설하며 "휴대전화를 잃어버렸으니 빨리 찾아 달라"고 떼를 썼다. 경찰이 "당장 찾기 힘드니 우선 휴대전화를 사용 정지하라"고 했다. 그러자 "경찰이 왜 그런 것도 못 찾느냐"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올해 퇴임하는 김영묵(57) 경위는 "30년 넘게 근무했지만 요즘처럼 지구대 꼴이 엉망인 것은 처음 봤다. 옆 지구대에선 도끼를 들고 와 출입문을 부순 사람도 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역삼 지구대에 5개월 전 배치받은 신참 김미숙(27.여) 순경은 한 달 전의 사건만 떠올리면 아직도 울화가 치민다. 자가용으로 택시 영업하던 운전기사를 적발해 조사하던 중 갑자기 조폭같이 생긴 세 명이 지구대에 들이닥쳤다.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김 순경을 향해 눈을 부릅뜬 채 "조사 똑바로 하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김 순경은 "위협을 느꼈지만 공무집행 방해로 입건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고 털어놨다.

경찰들은 취객들을 대할 땐 매우 조심스럽다. 잘못 다뤘다간 인권침해 시비가 붙어 불이익을 당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최근 취객을 진정시키다 손목을 세게 잡았다는 이유로 국가인권위원회에 제소당한 한 경찰관. 그는 "사흘간 청문감사관 앞에서 조사받았다. 이런 일을 겪고 나면 현장에서 몸을 사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믿기 힘든 현실이지만 취객이 경찰에게 행패를 부리거나 욕설을 해도 경찰에겐 이를 제지할 법적 권한이 없다. 현행 형사소송법에 따르면 벌금 50만원 이하 경범죄의 경우 주거가 분명하면 현행범으로 체포할 수 없다. 경찰이 취객에게 속수무책인 이유다.

◆특별취재팀=이철재.한애란.천인성.권호(이상 사회부문) 기자, 뉴욕=남정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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