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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4492 제86화 경성야화-27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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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1920년대 당시 종로 청년회관에서는 강연회니, 성토회니 하는 집회가 자주 열리고 있었다. 1920년 서울에 최초로 「조선노동공제회」라는 노동운동단체가 설립되어 『공제』 라는 기관지를 발간하였다.
그해 6월에는 한규설·이상재가 「조선교육회」를 설립한데 이어 12월에는 장덕수·오상근 등이 조선청년연합회를 조직하였는데 본격적인 좌익계통의 청년단체가 생긴 것은 그 이듬해인 1921년 「서울청년회」부터였다.
다음으로 김한·박일병 등이 1922년 봄 무산자동지회를 조직하였고 윤덕병이 조선노동연맹을 발기, 1923년 5월1일 「메이데이」데모행진을 기도하려다 검찰에 체포되기도 하였다. 김약수 등 사회주의자들이 서울에서 건설사를 조직한 것이 1924년 봄이었고, 이어서 홍명희·박헌영 등의 신사상연구회와 화요회가 탄생하였다.
이무렵 낙원동과 경운동·재동 등에는 이런 간판이 무수히 붙어 있었다.
특히 낙원동의 「한양탕」이라는 목욕탕 주변에는 목제 2층집이 많았는데 화요회·북풍회·조선노동총동맹 등의 나무간판이 죽 붙어있었다.
재동에는 그 당시 경기여자고등보통학교 건너편 큰 대문집 문짝에까지 「사회주의자 동맹」이니,「경성여자청년동맹」이니, 흑도회니 하는 나무간판이 무수히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이 단체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우중충하고 도깨비가 나올 것 같은 그 헐어빠진 대문에 들어가 회관이란데를 둘러보았다. 큰집의 사랑채 같은 것이 서너채 띄엄띄엄 있었고 유리창을 해 박은 큰 방 속에는 책상과 의자들이 놓여있었다.
책상을 중심으로 젊은 사람들이 서너명 앉아서 열심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어떤 방에서는 회의를 하고 있는지 연사가 책상 앞에 서있고 회원인 듯 싶은 청년들이 의자에 둥그렇게 앉아 있었다.
연사의 목소리는 참석자가 10명도 채 못되건만 마치 연설하듯이 목청을 높여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이들은 종로 청년회관과 천도교회당 등에서 이런 회합을 자주 가졌는데 지금 내가 기억하고 있는 연사들은 이런 사람들이었다.
김사국(서울청년회)·박원희(김사국의 부인)·박헌영·김찬(화요회)·이영(사회주의자동맹)·정종명·주세죽(경성여자청년동맹)·김약수(북풍회)·박일병(화요회) 등이 그들이다.
이들 가운데 가장 인상에 남는 사람은 여자에 박원희·정종명이었고 남자로는 박일병·김찬이었다. 이들이 연단에 서면 박수와 환호가 터지곤 했는데 박원희여사의 장중한 모습과 박일병의 웅변은 그때 청중들에게 큰 인기가 있었다.
총독부에서는 이런 사상단체에 대항하기 위해 친일단체를 만들었는데 시사신보를 창간한 민원식이 동경에 가서 자치운동을 하다가 양근환의 칼에 맞아 숨졌다.
또 동경에서 상애회를 조직, 조선노동자들을 착취하고 친일운동에 광분하던 박춘금이 총독부경무국장 마루야마 (구산학길) 의 비호 아래 동아일보 송진우·김성수 등을 권총으로 협박한 사건이 있었다.
이것이 1924년 4월의 일이었는데 이에 대해 안재홍 등이 「친일단체규탄대회」를 열려고 하다가 경찰의 제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한편 화요회·북풍회·조선노동총동맹 등을 조직하여 좌익운동을 전개하던 박헌영·김약수·임원근·조봉암·김찬 등이 「조선공산당」을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1925년 11월에 종로경찰서에 발각, 구속되었다.
다음해인 1926년에는 역시 공산당을 조직했던 이준태 등이 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종로경찰서에 체포되었다.
이렇게 해서 독립운동은 상해와 만주·시베리아 등지에서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이와 병행해 좌익혁명을 계획하는 공산당은 국내에서 농민과 노동자를 포섭해 두 운동이 모두 일본통치로부터 조선을 해방시키자는 공동목적을 가지고 분투하게 되었다.
신문지상에 공산당이 검거되었다며 그 주동인물의 사진들이 게재될 때마다 민중들은 민족의 영웅을 보는 듯이 그들을 존경하였다.
기름집 패들도 공산당이란 말에 처음에는 어정정하게 생각했지만 이들도 역시 일본놈 정치에서 우리들을 해방시키려는 운동이란 말을 듣고 크게 안심하였다.
1920년대 당시 서울 종로거리. 보신각주변에 전차매표소가 있고 그 주변에 사람들이 많이 몰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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