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스케치] 예절은 집에 두고 오셨습니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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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나 '관광'의 어원은 '고생'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집을 떠나 먼 곳으로 여행을 나서면 아무래도 집안에 있는 것보다는 고생일 수밖에 없다. 편하려면 집에 있어야지 굳이 밖으로 나갈 필요가 없다. 여행은 돈 주고 고생하러 가는 것이다. '사서 고생한다'는 옛말은 여행을 두고 하는 말이다.

여행이란 기계적인 일상에 시달려온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삶에 부대끼며 사느라고 제대로 느끼지 못했던 자연과 문화를 만나러 가는 것이다. 고생은 그것을 얻기 위해 반드시 지불해야 하는 하나의 기회비용 같은 것이다. 일상과 달라진 환경에 자신을 맞추고, 여행 중 시시각각 변하는 조건들에 대해 자기 욕망을 절제하는 것이다.

고생이란 그것을 얻기 위한 '강제된 자기절제'다. 고생을 억울하게 생각하고 피하려고 하면 여행의 참맛을 느끼지 못한다.

고속도로 휴게소에 버스가 주차하면 사람들은 볼일도 보고 군것질도 하면서 잠시 긴장을 푼다. 그때 음식을 들고 버스에 올라 와서 먹는 이들이 많다. 차 안에 냄새를 풍기기도 하고, 가끔 국물을 엎지르기도 한다. 출발시간도 잊은 채 마냥 돌아다니는 사람들도 있다. 또 다른 '개인'을 인정치 않는 개인주의는 여행에 있어서도 공공의 적이다.

요즘은 관광지가 따로 없다. 좋은 데가 있으면 어디든 차를 몰고 찾아간다. 그러다 보니 시골 마을길에까지 나들이 온 승용차들로 그득하다. 더러는 경운기가 다니는 농로에까지 염치없이 주차해 놓고 어디론가 사라진다. 그 바람에 농민들이 일을 나가다 말고 승용차 주인을 찾아 여기저기 뛰어다닌다. 이 모두가 자기절제의 고삐가 풀린 탓이다.

학생들의 수학여행 풍토도 예외가 아니다. 함부로 쓰레기를 버리고, 낙서하고, 칼로 시트를 찢어놓고, 기물을 파손하는 바람에 수학여행 버스는 며칠 만에 만신창이가 되고 만다. 그리고 술과 담배를 배우는 것도 수학여행 때다. 집이나 학교에서 하지 않던 일도 밖에만 나오면 그렇게 함부로 해대는 것은 아무래도 기성세대에게서 배운 듯하다.

외국여행이라고 다를 바 없다. 한 무리의 우리 젊은이가 일본 다카마쓰 고분을 보러 갔다. 그런데 음료캔을 마시며 들어가다가 제재를 받았다. 안에는 쓰레기통이 없으니 밖에서 다 마시고 들어가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매표소의 늙은 관리인이 타이르듯 나직이 말했다. 지금은 쓰레기가 아니지만, 다 마시고 나면 캔은 쓰레기가 된다. 그렇지? 우리 젊은이들은 대답할 말이 없었다.

비유컨대 여행은 이발소에 가서 머리를 깎는 일과 같다. 이발하러 간 사람은 남녀노소 지위고하에 관계 없이 의자에 앉아 이발사가 하는대로 따라야 한다. 의자에 앉아 가운을 두르고 거울을 바라보아야 한다. 면도할 때는 얼굴을 함부로 돌리지 않아야 하고, 머리감을 때는 두 눈을 감아야 한다.

이런 것들은 구속이 아니라 머리를 잘 깎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기회비용이다. 여행을 제대로 하려면 그런 기회비용을 반드시 지불해야 한다.

김재일 두레생태기행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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