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대통령의 남은 과제/유승삼(중앙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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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노 대통령은 「시복」을 타고난 사람이다. 돌이켜 보면 6·29선언에서부터 대통령당선,88올림픽의 개막,남북총리회담의 성사,한소수교,그리고 지자제의 실시와 압승에 이르기까지 정치적 시운이 깃들이지 않은 것이 없다.
물론 이 모든 것을 「시복」이나 「시운」이란 말로 묶는데는 다소 어폐가 있다.
능동적으로 쟁취한 부분도 분명히 있으며 찾아온 시대적 진운을 적절히 활용한 점도 무시되어선 안될 일이다. 그러나 남북총리회담의 성사나 한소수교와 같은 북방정책의 성공마저도 누구도 예기치 못했던 국제정세의 혁명적 변화가 없었더라면 이루어지기 어려웠을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동서분열 더욱 심화
노대통령은 그러한 연장선위에서 또다시 남북유엔동시가입이라는 대어를 낚았다. 이번에도 국제정세의 변화를 놓치지 않고 활용했다는 점에서 정부측의 자부와 흥분도 일단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정부일각으로부터 유엔가입에 대한 신분의 평가가 지나치게 냉정하고 인색했다는 불만이 전해지고 있는데서도 정부의 기대와 흥분을 감지할 수 있다.
그러나 신문의 차분함은 국민들이 유엔가입을 보는 시각과 인식,그 이하도 이상도 아니라고 본다.
사실 이번 유엔가입에 대한 국민의 일반적인 반응은 정부쪽의 자세나 기대와는 거리가 있다. 한마디로 무덤덤한 분위기다. 왜 그럴까. 왜 정부와 함께 흥분해 주지 못하는가.
물론 그 첫째 이유는 유엔가입이 한국의 국제적 지위에 대한 추인일 뿐이지 새삼스레 그것이 격상된 것은 별반 없으며 통일을 위해서도 아직은 그저 막연한 기대의 수준일 뿐 어떤 진전을 가져다주는 것은 없다는 냉정한 현실인식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유는 그것만은 아니라고 본다. 이번 유엔가입을 포함한 잇따른 대외적인 성취에도 불구하고 내부로 눈을 돌려 보면 동서의 분열이 남북분단 못지않게 심화되어 있고 계층간·세대간의 갈등과 대립도 여전히 풀리지 않은 숙제로 남아 있다. 또 「도덕성있는 정부」에 대한 약속이나 인권상황에도 문제가 남아있다. 그런데도 정부는 이에 대한 어떤 획기적인 해결책은 준비하고 있는 것 같지 않고 대외문제에만 전력투구하고 있는 인상이다.
○계층간 갈등도 여전
노대통령은 지난 88년 2월25일의 취임연설에서 지역간·계층간의 격차해소를 약속하면서 공정·정의로운 분배와 정치적 입장때문에 불이익을 당하거나 특혜를 보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다. 또한 「젊은이들의 꿈과 열정을 값진 영양소로 받아들일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3년반이 지나 노대통령의 임기도 막바지에 들어섰지만 많은 국민들은 그러한 약속이 실현되어가고 있다는 확신은 물론 앞으로의 기대도 갖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것이다. 현재 우리사회 에너지의 분산과 무기력,그리고 너나 구별없는 극심한 이기주의와 보신주의도 그로 인한 좌절이나 실망과 무관하지 않다.
또 눈앞의 삶의 문제가 바로 그렇게 방치되어 있기때문에 외치가 강력하게 추진되면 될수록 그것을 내치의 무성과를 상쇄하기 위한 정치공학으로만 보려들기도 하는 것이다. 당연히 평가받아야할 업적마저도 이렇듯 저평가받거나 굴절돼 인식되는 것은 현정부에는 물론 국민에게도 이롭지 않은 데도 말이다. 역시 중요한 것은 외치보다는 내치다. 이제 노대통령의 남은 임기도 최장으로 잡아야 1년반이다. 대선을 기준으로 하면 1년 남짓에 불과하다.
그동안 노대통령이 보여준 정치스타일은 세평그대로 밀리고 밀린 뒤 막판에 가서야 겨우 단을 내리는 「벼랑의 정치」였다. 이런 정치스타일이 바람직하냐,않느냐를 논하는 것도 이미 뒤늦은 일이다. 해결해야할 과제와 남은 임기를 견주어볼때 지금이 바로 벼랑앞에 다다른 시점인 것이다.
동서·계층·세대간에 깊이 파인 고랑을 현실적으로 노대통령 이외에 누가 메울 수 있을 것인가. 이른바 차기 「대권주자」들에게 숙제를 떠넘길 것인가.
누구누구랄 것도 없이 현재 그들에겐 다음 권력의 향방이 관심거리지 우리 사회의 기본적인 문제는 안중에도 없는 형편이다.
현재로선 문제의 해결사는 오직 노대통령 한사람 뿐인 것이다. 1년반 뒤면 싫어도 자리를 떠나야한다. 그렇다면 권력의 욕망으로부터 가장 초연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노대통령이다. 눈앞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문자그대로 역사를 위한 결단을 내릴 수 있고 내려야 할 입장에 혼자만이 있는 것이다.
○내치에 산적한 숙제
따라서 이제 노대통령은 그동안 밖으로 쏟았던 정열과 관심을 내부로 집중해 묵은 숙제에 대해 하나하나 결단을 내려가야 한다. 초연한 입장일 수 있는 지금이야말로 동서·세대·계층간의 골을 메울 과감한 내정개혁을 단행할 수 있는 시점인 것이다. 당장의 정치적 이슈가 되고 있는 선거제도의 개혁만 해도 국가장래를 위한 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노대통령밖에는 없다.
평가는 결국 종합적인 차원에서 내려지게 마련이다. 과감한 내정개혁을 서둘러 적어도 그 기틀만이라도 잡아 정권을 물려주어야 한다. 그래야 훗날 대외면에서의 성과도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고 설사 그동안에 허물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에 의해 상쇄돼 기대하는 사후보장도 이뤄질 것이다.
결단의 시간은 정말 얼마남지 않았다. 지금 결단한다 해도 결코 빠른 것은 아니다.<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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