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공계 출신 잡아라" 업계비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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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국내굴지의 가전 업체인 A전자의 신규채용담당 김 모 대리는 요즈음 한여름 복더위도 아랑곳없이 서울시내 대학 과 사무실과 교수연구실을 누비느라 비지땀을 흘리고 있다.
일반직사원은 모집광고만 내면 구름처럼 지원자가 몰려들지만 정작 올 연말까지 특채해야 하는 전자분야 연구기술인력 2백 명을 채우기 위해서는 직접발로 뛰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봄·가을 두 번 산학 장학생모집 때만 학교를 들러 보면 됐는데 올해부터 1년 내내 대학에서 살다시피 합니다.』

<2학년 때 입도 선두>
박사들이야 임원들이 국내외출장 등으로「모셔 온다」고 하더라도 이른바「일류대」의 석사·학사들은 이미 2∼3학년 때「입도선매」돼 버려 마땅한 사람을 구하기가 점점 어려워져 간다는 얘기다.
역시 손꼽히는 가전 사인 C전자는 이공계 전문인력을 확보하기 위해「리크루트」라는 「기동타격 대」를 운영하고 있다.
그룹산하 기술연구소의 석·박사 연구원 20여명으로 지난6월 구성된 이 조직은 전공별·학교별로 영역을 나눈 뒤 1인당 20명의 연구인력에 대한 신상명세를 파악, 관리토록 하고 있다. 이들은 동문후배들의 신상자료를 파악해 정기적으로 모교를 드나들며 회사선전을 하면서 별도의 활동비도 지급 받고 있다.
최근 이들은 l박2일로 회사소개방법, 입사를 권유하는 기법 등을 익히는 연수까지 다녀오기도 했다.
이들 기업 외에도 크고 작은 대부분의 전자관련 업체들은 인원규모나 조직 형태에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이공계 전문인력 채용업무가 별도로 독립돼 있으며, 학연·지연을 총동원해 쓸 만한 인재를「물어 오는」사원에 대해서는 인사에 반영하는 등 갖가지 수단을 강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른바「구직 난 속에 구인난」이 빚어낸 구인풍속도다.
이공계 구인난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그러나 구인난이 갈수록 심해지는 징후는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우선 정부 부처나 각 연구기관·관련협회의 조사통계를 보면 한결 같이 향후 10년간 인력부족이 더욱 심해진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상공부조사에 따르면 대표적으로 인력난을 겪고 있는 전자·전기부문의 경우 90년 한해 대졸 출신 기술자수요가 6천9백 명이었으나 기업들이 선호하는 수도권 8개 대학이 배출해 낸 공급인력은 수요의 23%에 불과한 1천6백여 명이었다.
특히 95년에는 이 분야 석·학사수요가 1만7천4백 명으로 공급능력을 6천2백 명 초과하고 2천년에는 1만여 명이 부족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이같은 물리적 수급불균형만큼이나 기업을 안타깝게 만들고 있는 것은 취업보다는 상급학교에 진학하려는 학생들의 고학력 추구현상이다.
서울대 전자공학과 박사과정의 최홍섭씨는 상급학교에 일단 진학해 놓고 보는 것이 유리한 점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학생들은 진학희망>
『일단 병역문제를 유예한다는 동기도 크지만 석사과정을 밟으면서 기업에 진출할지 아니면 국내외에서 계속 박사과정을 공부할지 차분히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선택의 폭이 넓어지는 셈이죠.』
서울대 화공과 박사과정의 윤어홍씨도『기업체를 가더라도 석사과정 2년간 학비전액은 물론 급여 일부까지 받는 데다 경력2년을 꼬박 인정받을 수 있으니 구태여 학부만 마치고 입사할 이유가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서울대 금속공학과를 거쳐 KAIST석사과정을 마친 하 모씨는 대기업 연구소 두 군데를 전전한끝에 최근 미국유학을 가기로 격심하고 유학준비를 하고 있다.
하씨는『외국박사로 채용된 사람과 국내석사학위만 받고 출발한 사람은 연구소 내에서의「종착역」이 너무도 눈에 뻔하게 보여 박사학위를 따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서울대 전자공학과의 경우 내년 2월 학부졸업예정자 48명 가운데 본교대학원 지망생이 35명 내외. 여기에 해외유학·한국과학기술원 진학을 준비하는 학생들을 빼면 기업체로 가겠다는 학생이 고작 2∼3명인 실정이다.
서울공대의 웬만한 학과는 물론 수도권 대학의 전자·전기·컴퓨터·화공관련 학과들도 정도 차는 있지만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에 따라 기업들이 이들 학생들에게 제시하는 특전의 강도 또한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기업들은 이미 2∼3년 전부터 학부 4학년 때 주던 산학 장학금을 3학년 때부터 앞당겨 지급하고 있다.
A기업의 한 인사담당자는『대학생과외가 시작된 이후 산학장학금을 받겠다는 학생이 줄어들고 있다』며 최근에는 2학년까지 스카우트 손길이 뻗치고 있는 데다 한 달에 10만∼20만원씩의 용돈도 주고 있다고 말했다.
석사과정의 경우도 학비지원은 물론 정식직원 수준의 급여까지 지급하는가 하면 요즘 들 어 『원하면 해외유학도 보내 주겠다』는 조건으로 인재를「유혹」하고 있는 실정이다.

<교수에게 선물작전>
특히 일부기업들은 학생뿐만 아니라 교수들에게 냉장고 등 가전제품을 선물하는 등 적극적인 구인전략을 펴고 있다.
삼성전자·한국전력기술·대우전자 등 이 오래 전부터 실시하고 있는 사내대학원제도도 우수학부 생을 끌기 위한 방편이다.
이들 업체는『회사를 다니면서도 사내대학원에서 충분히 공부할 수 있다』고 학생들을 설득하고 있다.
인력난은 회사의 입지에까지 영향을 준다. 국내 가전 3사의 연구소들은 주로 서울에서 가까운 경기도 일대에 흩어져 있는데 이는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서울에서 멀면 입사를 꺼리기 때문이다.
올 연말까지 수도권지역 산하연구소를 서울대우센터 빌딩으로 한데 모으기로 한 대우의 한 관계자는『종합연구기능을 높이기 위한 의미도 있지만 연구소가 서울에 있으면 연구원 스카우트하기가 한결 쉽기 때문』이라고 배경을 설명했다.
최근 확산되고 있는 기업체의「인턴 사원제」나 대학 내에 출연연구소를 잇따라 설치하는 것도 우수학생들을 미리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서울대 자연과학대 노현모 교수는『취직 철이 돌아오면 인문계 교수들은 자기학생을 써 달라고 기업체를 찾아다니고 이공계교수들은 밀려드는 각 기업의 추천의뢰를 받고 어디에 학생을 보내야 할지 고민하는 형편』이라며『현재 이공계와 인문계의 필요인원이 7대3인데 비해 대학배출인원은 오히려 3대7인 기현상이 개선되지 않는 한 이공계 구인난은 해소되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홍승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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