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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억대 국제 환치기 조직 적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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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2005년부터 파키스탄에 굴착기 부품을 수출해 온 무역업자 강모(43)씨는 최근 파키스탄 중개업자로부터 솔깃한 제안을 받았다. '이슬람인 고유의 네트워크를 이용하면 수출 관련 비용을 절반으로 줄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최고 70%에 이르는 관세와 송금 수수료를 줄일 방법을 찾던 강씨는 지난달 29일 파키스탄 측에서 771여만원을 입금받은 사실을 확인하고 물품을 파키스탄으로 보냈다.

강씨의 돈거래는 '하왈라'를 이용한 것이다. 아랍어로 '신뢰'라는 의미를 지닌 하왈라는 세계적 네트워크를 가진 아랍권의 비공식 송금 시스템을 일컫는 말이다. 하왈라 방식의 환치기 영업을 해온 국제 조직 '마누르('빛나다'라는 뜻의 아랍어)'의 국내 조직원이 경찰에 적발됐다.

◆불법 환치기 관련자 23명 적발=서울경찰청 외사과는 5일 국내 은행에 환치기 계좌를 개설한 뒤 400억여원의 불법 외환 거래를 알선한 혐의(외국환거래법 위반)로 파키스탄인 M(35)을 구속했다.

또 파키스탄인 알선책 9명과 국내 수출업자 13명 등 22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미국이 탈레반 등 이슬람권 테러 조직의 주된 자금줄로 지목하고 있는 이슬람 지하 금융망 조직이 국내에서 적발된 것은 처음이다.

경찰에 따르면 M은 2005년 7월 국내에 들어와 위장 무역회사를 만들고 시중은행에 3개의 계좌를 개설한 뒤 국내 업체에 취업한 파키스탄인들과 국내 무역업체를 대상으로 400억원 규모의 환치기 영업을 해온 것으로 밝혀졌다.

◆해외에서도 계좌이체=M은 인터넷 뱅킹이 가능한 계좌를 개설한 뒤 공인인증서를 다운받아 파키스탄의 조직 본부와 미국에 보낸 것으로 확인됐다.

파키스탄 본부에서는 인증서를 이용해 1000여 차례 통장을 열람했고, 78회에 걸쳐 인터넷 뱅킹으로 계좌이체를 한 사실도 드러났다.

특히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자금이 이체된 것으로 나타나 경찰은 국정원과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협조를 받아 테러 조직 연관 여부를 수사하고 있다.

이번에 경찰에 적발된 규모는 400억원이지만 금융정보분석원(FIU) 등 수사 당국은 한 해 최소 10억 달러 이상이 환치기를 통해 외국으로 흘러가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1년 미만 거주 외국인 근로자의 나라 밖 송금 액수는 2006년 1억4000만 달러라고 한다.

경찰 관계자는 "국정원.FIU 등과 협력해 외국인 밀집 지역의 환치기 조직을 적발하는 데 수사력을 모으고 있다"고 말했다.

권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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