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제주4·3사건」작품화 회오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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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한라산 하나 터져 내려 이루어진 섬이 제주도다. 섬 어느 곳에서나 이 산이 보이며 팔방해안으로부터 뻗어 오르다 한곳에 모두어진 곳이 바로 한라산의 정상인 백록담이다.
『귀신도 쓸쓸하여 살지 않는 한 모롱이, 도체비 꽃이 낮에도 혼자 무서워 파랗게 질린다』고 1939년 정지용은 시『백록담』을 통해 한라산의 태고적 분위기, 혹은 귀기를 묘사했다. 뭍으로부터의 거리와 높이로부터 우러나오는 태고적 신비, 아니면 아무 것도 살수 없다는 절멸감의 한라산 백록담 분위기가 그대로 제주의 역사와 문화의 뿌리인지도 모른다.
제주도가 민족사의 전면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고려시대의 삼별초난. 제주도까지 내려와 항몽의지를 불태우던 김통정이 이끄는 삼별초군이 패해 뼈를 묻은 곳이 한라산이다. 삼별초가 패망한 후 한라산은 1백년간 원나라의 목마장으로 전락하고 만다.
목장으로 시작된 뭍에서의 제주침탈은 조선군에도 가속 이어져 제주의 특산물을 중앙에 올려보내야 했다.
『팔십 넘은 늙은이가/창파만리 중에 있네/말 한마디가 무슨 죄 되리/세번 내쫓기니 궁
상스럽다 하겠네.』
장희빈의 아들을 세자책봉하지「불가하다」는 상소를 올려 숙종으로부터 노여움을 사 83세 나이로 제주도로 유배당한 송시열의 시다.
송시열 뿐아니라 뭍과 유리된 절해고도인 관계로 김정희등 많은 지조있는 선비들이 이곳에 유배돼 후손을 남기거나 학문을 가르쳐 이 섬에 짙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구한말 탐관오리들에 대한 항쟁인 임술민란, 이재수의 난, 나아가 항일운동등이 곧은 선비정신에서 이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2차대전 패망으로 일제가 물러나고 대신 들어선 미군정하에서 수만명이 희생된 제주 4· 3사건은 제주 전사를 통해 가장 아픈 상처로 기록된다. 48년 4월3일 무장봉기로 시작, 9년여를 끌며 제주도 4백개 부락중 2백95개가 불타고 25만 도민중 5만∼8만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는 4·3사건은 오랫동안 「반란」또는「폭동」으로 불러왔었다.
이 4·3사건은 78년에 와서야 현기영씨(50)의 단편『순이 삼촌』을 통해 문학적으로 형상화되기 시작한다. 4·3을 직접 다루지 못하고 그날의 학살현장에서 살아남은 자가 30년이 지나도록 그 악몽에서 못 벗어나다 자살하고 마는 한 제주도 농부를 통해 4·3사건을 간접적으로 이야기했다.
그런데도 현씨는 79년11월 합동수사본부에 연행돼 2박3일간 고된 육체적 고문을 받으며 『순이 삼촌』집필동기를 밝혀야만 했다. 4·3사건을 아주 간접적으로, 감추어지고 억눌려진 한의 응어리로만 드러낸 『순이 삼촌』에서 별다른 혐의점을 찾지 못한 합동수사본부는 포고령 위반으로 현씨를 20일간 경찰서 유치장으로 보냈다.
제주도 출신인 현씨는 그가 보고 느낀 것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제주도 한라산 중산간지대. 낮에는 토벌군에, 밤에는 산사람에 생명의 위협을 겪으면서 그들이 살아왔던 세월은 어떤 것이었을까. 해방공간 민족의 비극이 집약된 것에 다름 아니었다.
작가 현씨는 한으로만 응어리져가는 제주도의 비극을 문학으로 형상화시키지 않고서는「작가」된 자의 책무를 다하지 못한다는 강한 의식을 『순이 삼촌』속에 담아보려 했던 것이다. 지금은 해마다 4·3의 의미에 대한 학술회의가 열리고 기념행사가 벌어지지만 10년전의 상황은 달랐다. 금기의 억압이 작가의 입을 막고자 서슬푸르게 하고 있을 때였다.
『순이 삼촌』의 필화는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80년 8월21일 현씨는 다시 경찰 대공과에 연행돼 4박5일 동안 조서작성에 응해야 했다. 기소하면 법정시비로 비화될게 뻔한 이 사건을 그들은 기소하지 않고 겁만 줘 돌려보내 예비검속 내지 사상검진 효과를 노린 것이다. 그 직후 『순이 삼촌』은 판금조치 당해야 했다.
『혓바닥을 깨물 통곡없이는 갈수 없는 땅/발가락을 자를 분노 없이는 오를 수 없는 산/제주도에서, 지리산에서, 그리고 한반도의 산하 구석구석에서/민족해방을 위하여 장렬히 산화해 가신 전사들에게 이 글을 바친다』로 시작하며 87년3월 무크 『녹두서평1』에 발표한 이산하씨(31)의 장시『한라산』은 표현자유문제를 놓고 치열한 법정논쟁을 불렀다.「남한 단독정부수립을 위한 5·10선거를 반대하는 제주도민의 항쟁과 이를 무차별 진압한 미군정 및 토벌대의 학살」을 내용으로 하는 이 작품은 발표즉시 필화를 불러 출판사 대표와 편집장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됐으며 수배중이던 이씨도 그해 11월11일 구속됐다.
검찰측은 『한라산』이 『남한을 미국의 식민지로 파악하고 「제주 4·3무장폭동」을 민족해방과 민족주의를 위한 도민들의 항쟁으로 미화하는 한편 인공기를 찬양하는등 북한공산집단의 활동에 동조한 이적 표현물』이라고 공소했다.
이에대해 홍성우·안영도 변호사는 변론을 통해 『시의 내용을 이루는 역사적 기술들의 대부분, 특히 제주도민이 사건의 주체가 됐던 점,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옥석구분하지 않고 많은 양민을 희생시켰다는 점, 도민대부분은·공산주의와는 무관한 양민이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라고 밝혔다.
한편 문단에서는『반공주의적 편견을 벗어나 40년간 은폐되었던 4·3사건의 진실에 접근했다』『현대사의 불명예스러운 매장국면을 분석적 역동성을 통해 파헤쳤다』고 평가하면서 민족문학작가회의 등에서는 이씨를 즉각 석방하라는 성명서를 냈다.
이씨는 최후진술을 통해『이 시는 용공도, 반공도 아닌 민족해방 통일지향의 시사시일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씨는 1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88년10월3일 개천절 특사로 풀려났다.
「한라산 필화사건」은 작품자체가 문제돼 작가가 구속된 80년대 첫 필화사건으로 표현의 자유문제를 심각하게 제기했다.『말 한마디가 무슨 죄 되리』하며 제주도로 유배당한 송시열의 원망이 이 시대에도 완전히 가시지는 않은 모양이다.

<이경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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