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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81)<제86화>경성야화(16)조용만|고종승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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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고종황제는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지탱해보려고 갖은 노력을 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헤이그 밀사사건 때문에 이등박문으로부터 책임을 추궁 당한 끝에 마침내 폐위되었다.
덕수궁안 함령전에서 1919년 1월 승하했는데 일본인들에 의해 독살됐다는 소문이 퍼지자 백성들은 독립만세를 더욱 열렬하게 외치고 나섰다.
서울에서도 노동자·날품팔이·지게꾼들이 떼지어 만세를 불렀다. 이들은 태황제(고종)의 원수를 갚아야할게 아니냐며 목청을 높였다. 우리동네 기름집에 모이는 패들도 말끝마다 태황제에게 독약을 탄 식혜를 들게 해 돌아가시게 한 왜놈들에게 원수를 갚아야 한다며 순사들이 없는 틈을 타 큰길로 우루루 몰려가 한바탕 만세를 부르다 돌아오곤 했다.
고종황제 독살설은 아주 터무니없는 소문만은 아니었다. 네덜란드의 수도 헤이그에서는 만국평화회의가 열리고 있었고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8년 파리에서는 강화회의가 열려 연합국측 대표인 미국의 윌슨대통령이 민족자결을 제창하던 때였던 만큼 일본이 또 무슨 일을 저지르지나 않을까 하고 고종황제의 신변에 무척 엄중한 경계를 하던 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고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던 시종 김황진이 고종과 궁중밀의를 가졌는데 이 사실이 당시 궁중에 잠입해있던 밀정에 의해 탐지되는 바람에 김황진이 파면된 일이 있었다. 그러던 차 건강에 아무 이상이 없던 고종이 별안간 승하했으니 그 사인에 대해 백성들이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종황제가 승하하신 것이 양력으로 1919년 1월 21일이고, 음력으로는 그 전해 섣달 그믐께여서 몹시 추운 때였다.
덕수궁 정문인 대한문 앞에는 수십 개의 널찍한 멍석을 깔아놓고 일반 시민들로 하여금 엎드려 망곡을 하게 하였다.
서울은 물론 시골에서 백립에 흰 두루마기를 입은 노인들이 많이 올라와 멍석에 엎드린 채 오랫동안 통곡하고 가는 것을 보았다.
우리 동네에서도 떼지어 망곡을 하러 갔었다. 어느 동네나 망곡을 안하면 큰 수치였으므로 동네 남자들이 서로 날짜를 정해 몰려 나섰는데 나도 그때 보통학교 1학년생이었지만 우리 집 대표로 나섰다.
대한문 오른쪽 끝에 있는 멍석에서 절을 하고 나오는데 뒤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떼미는지 그만 목도리를 놓고 나와버렸다.
모자와 목도리를 풀고 절을 하는 법인데 그때 얼떨결에 목도리를 놓고 나온 것이다. 그 목도리는 상해에서 가져왔다는 검은 털로 짜 만든 값비싼 것으로 어머님이 특별히 보내주신 것이었다.
우리 같은 1학년 애들은 어려서 감히 만세 부를 엄두를 못 냈지만 최고학년인 4학년생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 중에는 스무살짜리가 많았고 다른 학교에서 자꾸만 만세를 부르니 안 할 수도 없었다.
며칠뒤 학교에 나가보니 아침조회가 끝나자 4학년생들이 일제히 만세를 부르며 교문으로 뛰어나가려고 하였다. 선생들은 놀라 대문을 잠그고 만세를 못하게 제지했지만 머리 큰애들이라 운동장 끈에 있는 남의 집 울타리를 부수고 들어가 큰길로 나갔다. 큰길에서 만세를 부르자는 것이었다.
우리 담임선생은 급히 우리들을 몰고 교실로 들어갔기 때문에 그후 어떻게 됐는지 모르지만 교동보통학교 애들의 의기를 크게 떨쳤을 것이다.
경찰이 마구 때리고 잡아넣고 했지만 만세운동은 날이 갈수록 더해가서 종로 큰길에 있는 가계들도 예외 없이 문을 닫았다.
동무들과 같이 종로 큰길에 나가보니 큰 가게들이 문을 죄다 닫아 길거리가 쓸쓸하고 텅 빈 것 같았다. 순사들이 가게마다 다니면서 문을 열라고 했지만 그들의 성화에 못 이겨 잠시 문을 열었다가는 또다시 문을 닫았다.
가게문을 닫는 것은 철시라고 해서 그 자체가 일종의 시위나 반항운동이었다. 이것은 뒤에서 청년들이 시키는 것으로 상인들은 어느쪽 말을 들어야 할지 곤란하다고 하더라는 말을 기름집 패들로부터 들었다.
나는 그때 열 한살이었는데 어른들의 그같은 이야기를 듣고서야 독립이 무엇인지를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우리반 아이들은 그러나 뭐가 뭔지 모르고 있었다.
나는 주로 기름집에서 하는 어른들의 이야기, 집에 오는 종형들의 이야기로 세상일에 눈떠가게 되었다. 【이용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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