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물어진 소련의 자존심/문창극 워싱턴특파원(취재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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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소련은 역시 과거의 소련이 아니었다.
모스크바의 미소정상회담을 취재하면서 기자는 엄청난 변화를 실감할 수 있었다.
외교라는 것이 모두 그렇지만 부시 미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 대통령이 주고받는 말은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싸했다.
그러나 한쪽은 상대방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다른 한쪽은 이미 허물어진 자존심을 포장하려고 애쓰는 노력이 역력했다.
두 정상은 『두 강대국이 오랜 적대관계를 끝내고 역사의 새장을 쓰기 시작했다』『새로운 동반관계와 튼튼한 평화의 기초를 닦았다』고 서로 치하했다.
그러나 이러한 수식어 뒷장에는 엄연한 역사적 현실이 있었다.
양극시대는 이미 끝장나 역사의 문서로만 남아있다는 사실을 재확인 했다.
미국의 경제적 지원,확대하면 서방의 경제적 지원여부에 나라의 운명을 매고 있는 소련의 위치는 참담하기까지 했다.
부시 대통령의 정중하지만 뼈있는 다음과 같은 충고를 이들은 외면할 수 없는 입장이 됐다.
『크렘린 장벽 안에 있는 소수의 핵심분자가 권력을 좌지우지해서는 안된다』『고무도장 역할만 하던 의회와 일당독재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군수산업을 포기하지 않는한 소련의 경제적 희망은 없다』
불과 1∼2년전만 해도 감히 상상할 수 없었던 말들이다.
거기에 덧붙여 부시 대통령은 『개혁에 저항하는 반동세력이 아직 큰 권력을 갖고 있다』고 경고하며 『미국이 자유와 개혁세력의 편에 있음을 분명히 한다』고 못박고 있다.
그뿐 아니다. 부시 대통령은 고르바초프 말고도 그의 정적에 해당하는 옐친러시아공 대통령,셰바르드나제 전외무장관 등 개혁을 촉구하는 반대세력들을 만나 이들을 고무했다.
어떻게 보면 참을 수 없는 내정간섭일 수도 있으나 묵묵히 들을 수 밖에 없는게 소련의 현실이다.
무엇이 소련을 이런 지경으로까지 몰고 왔을까. 그것은 전체주의와 획일주의가 가져다준 결과일 것이다.<모스크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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