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랩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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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현대의 공중전은 적이 보이지 않는 거리에서 이뤄진다. 적기뿐 아니라 아군 전투기도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범위 밖에 있다. 레이더로 유도되는 사정거리 수십 ㎞의 미사일이 전투기에 장착되면서 교전 거리가 늘어난 탓이다. 하늘을 새까맣게 뒤덮은 전투기들이 편대를 이룬 채 눈앞의 적기와 싸우는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을 그린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여기서 한 단계 더 도약한 것이 스텔스 전투기다. 레이더에 포착되지 않는 전투기를 보유한 나라는 제공권 다툼에서 월등한 우위를 차지한다. 공중전의 철칙인 "먼저 보고 먼저 쏘고 먼저 격추시키기(first look, first shot, first kill)"가 한층 수월해지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강펀치가 있어도 링 위에서 맞서는 상대방이 투명인간이라면 무슨 수로 대적하겠는가.

지금까지 개발된 전투기 가운데 가장 완벽한 스텔스 기능을 갖춘 것은 미국이 2005년 12월부터 실전 배치를 시작한 F-22다. 기체 재료와 설계, 도료에 이르기까지 록히드마틴사의 독자적 기술이 응축돼 있다. 하지만 스텔스 기능만으로 매나 독수리와 같은 맹금류(猛禽類)란 뜻의 '랩터'가 F-22의 별명이 된 건 아니다. 랩터의 최대 순간 속도는 음속의 2.4배, 애프터버너를 끈 상태에서도 마하 1.7까지 속도를 낼 수 있고 순간적 선회 능력도 탁월하다.

기체에 장착되는 미사일, 발칸포 등의 성능도 기존의 전투기를 능가한다. 아직 실전에 사용된 사례는 없지만 "한 대의 F-22가 동시에 다섯 대의 F-15를 상대해 3분 만에 모두 격추시켰다"는 등의 모의전투 사례가 회자되고 있다. 요컨대 '항공 지배 전투기'(air dominance fighter)란 별칭이 무색하지 않은 능력이다. 유일한 결점이라면 F-15의 세 배인 1억2000만 달러(약 1100억원)를 호가하는 값비싼 가격이다. 일본 자위대가 탐을 내고 있지만 미국도 흔쾌히 팔 기세는 아니다.

아직 미국 영토를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는 F-22 12대가 이번 주부터 3개월 예정으로 일본 오키나와 기지에 배치된다는 소식이다. 한국 공군과의 합동 훈련도 잡혀 있다고 한다. 6자회담 재개를 앞둔 미국이 유연한 협상 태도를 보이고 있지만 그 이면에서는 "딴생각 품지 말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셈이다. 북한이 랩터의 이동 배치를 트집 잡지 않도록 이번 회담에서 구체적 성과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예영준 도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