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당의 기일(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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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고당 조만식 선생을 「한국의 간디」라고 부르는 까닭은 그가 일제에 비폭력 항거를 한 때문만은 아니다.
고당은 간디처럼 만학으로 외국(일본)유학을 했지만 돌아와서는 더 철저한 민족주의자가 되었다.
그는 무명옷을 입고 말총으로 만든 갓을 쓰고 다닌것으로 유명했다. 옷고름도 낭비라고 단추를 달았고 신발도 갓신을 신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치약도 외국것이라하여 외면하고 늘 소금으로 양치질을 했다. 「내살림은 내것으로」라는 생활신조를 그는 몸으로 실천한 것이다.
고당이 유명한 「조선물산장려운동」을 벌이면서 한 말은 오늘의 기업인들이 들어도 귀가 따가운 말이다.
『국산품 애용이라고해 물건을 아무렇게나 만들어 소비자를 속이고 제돈 벌이만 하는 것은 도리어 국산품을 모독하는 행위다. 물건보다 먼저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국산품의 질은 민족의 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대부분의 후학들은 고당의 성품이 비단결같이 곱고 온화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대단히 근엄했다고 한다. 언성은 언제나 조용하고 다정하며 자상하기도 했다. 그래서 오산학교 교장시절 학생들이 웬만큼 잘못을 해도 언성을 높이고 꾸지람을 하는일 없이 언제나 사리를 따져 웃는 얼굴로 타이르기만 했다.
그러나 조회시간 훈화를 할때는 위엄과 결단이 치솟는 불길같은 열변을 토해냈다고 한다.
이같은 결단과 용기는 광복직후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과 그 앞잡이들이 신탁통치를 강요하며 총칼로 그를 위협할때 더욱 진면목을 발휘했다. 그는 『당신네들은 지금 총을 우리 앞에 갖다 대놓고 이 회의를 하고 있지. 그러나 총 아니라 대포를 갖다 들이대 봐. 이 조만식은 끄떡도 하지 않을테니…』 하며 그들의 요구를 끝내 거절했다.
그 고당 조만식 선생이 6·25전쟁 와중인 50년 10월18일 북한당국에 의해 총살되었다는 사실이 어제날짜 중앙일보에 처음 보도되었다.
지금까지 나온 몇권의 전기나 단편적인 글에도 고당의 사거일을 단정적으로 밝힌 적이 없었다. 그래서 가족들도 선생의 기일을 몰라 생신날에 추모를 올렸다고 한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우리는 이제부터 북한사를 다시 써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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