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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니뽑아 틀니박는 언어교육/김동수(중앙칼럼)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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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어느 라디오방송에서였던가,「점잖은 개가 싱크대에 먼저 오른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청소년을 상대로한 방송진행자가 재담처럼 던진 이 말에 피식 웃음을 흘리긴 했지만 곰곰 생각해 보니 그냥 넉살로만 넘길 일은 아닌성 싶다.
시골집이라해도 웬만하면 부엌을 기능적으로 편리하다는 「입식」으로 개조해 가고 있는 세상이라 부뚜막을 모르게 될 세대에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다.
부뚜막이란 말의 실체를 모르니 전래의 속담에서 배어나오는 맛은 커녕 의미조차 모를 테고 종래는 죽어버린 말로 고어사전에서나 심심풀이로 찾아보게 되는 시절이 다가오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다.
그게 부질없는 기우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은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 주변을 둘러보면 더욱 짙어진다. 거리의 간판·상품광고·출판물·방송에서 거침없이 쏟아져 나오는 외래어와 외국어의 홍수에 떼밀려 가는 느낌이다.
최근 어느단체 조사에 따르면 과자류의 이름만 해도 60% 이상이 외국식으로 붙어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주로 어린이들을 상대로 한 상품들이다. 어느 상품이나 상호경쟁에서 그런 예를 우리는 어디에서든지 볼 수 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쓰고 있는 말은 또 어떤가. 『요즈음 러시아워에 오너드라이버가 많은걸 보면 마이카시대에 들어선게 분명하다』는 말에 쑥스러워하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을 것 같다.
극단적인 예일지 모르지만 그보다 심한 경우로 지난해 청소년을 상대로한 방송에서 있었던 실례도 잊혀지지 않는다.
출연자들의 대화중에 『좀더 아카데믹한 퀘스천을 던질 수 없나』는 질문에 『하이소사이어티한 무드속에서 이야기하고 싶다』고 천연덕스럽게 주고 받더라는 이야기다. 방송위원회 언어심의소위원회에서 지적했던 내용이다.
20여년전 국어학자 김윤경이 외국어 남용을 개탄하며 『멀쩡한 생니 빼고 틀니 박아넣는 격』이라고 비유했던 현상이 더욱 심해지고 있는 세상이다. 쓸데없이 기를 쓰고 외국어를 섞어쓰려는 요즘 우리의 심리상태는 한때 돈푼깨나 있으면 생니를 깎아내고 누런 금으로 덧씌워 그것도 멋이라고 뽐내려던 위인들의 허세와 다른 것이 무엇일까. 전국민의 급속한 졸부화에 따른 정신적 빈곤화 현상은 아닌지 모르겠다.
언어는 살아 있는 것이라고 흔히들 말한다. 그때 그때의 사회현실에 따라 다듬어지고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시대에 유행이 있듯이 언어에도 유행이 있게 마련이다. 문제는 그렇게 유행하는 말이 어떤 말이냐는 것이다.
감각적인 「이미지 시대」,「일과성시대」라고도 일컬어지는 요즘에 맞는 말,주로 미국식 문화가 중심을 이룬 영어가 주류를 이르고 있다. 그렇게 수입된 언어가 우리의 의식과 사고 깊숙한 곳을 휘젓고있다.
언어의 유행은 옷차림이나 취미의 유행과는 그 의미가 다르다. 언어는 인간 사고의 근원이자 방법이다. 「언어는 국민의 마음의 창」이니 「국어가 국민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국가에 의해 형성된다」는 말이 있듯이 언어는 바로 우리자신이기도 하다.
외래어 특히 미국식 영어에 시달리는 나라는 우리뿐이 아니다. 그래서 자기말을 지키기 위해 어느 나라든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다.
자기말 아끼기로 이름난 프랑스에서는 1975년에 「외래어추방법」이 마련돼 1977년 발효됐다. 이 법에 따라 페어플레이,디스크자키,핫도그,데이타뱅크,쇼비즈니스,하드웨어 등의 용어가 모두 프랑스식 용어로 바뀌었다.
법규정에 따르면 광고,공고,계약서,청구서,상품사용설명서,관공서의 문서는 물론 방송의 편성내용 등에서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일절 외국어를 쓰면 안되도록 돼있다. 얼마나 철저한지 「불어로 바꿀 수 없는 경우는 반드시 불어로 설명을 붙인다」고 규정하고 위반할 경우 80∼1백60프랑의 벌금을 내도록 하고 있다.
이 법을 시행하면서 당시 시라크 수상은 『언어의 질을 개선하는 것은 생활의 질을 개선하는 것』이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이를 두고 영국 신문들에서는 『외래어 토착화를 금지하려는 것은 인종차별과 마찬가지로 시대착오일 뿐 아니라 문화적 범죄다』는 등의 비아냥이 있기까지 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입장에서 보면 외래어의 홍수속에서 국어를 지킨다는 국가정책의 발동이었다.
우리의 경우 국어학자와 일부 여론에서도 이미 외래어에 대한 걱정을 해온 지는 오래다. 그러나 아직 국가가 정책적으로 이런 문제를 검토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일이 없다.
오히려 그보다 앞서 국제화시대라는 이름을 빌려 어린세대에 조기 영어교육을 실시할 방침이라고 한다. 언어습득에 의해 사고형성의 결정적 시기를 이루는 것은 10대말기까지라는 점,그것도 국민학교 시절은 모방심리·흡수력이 왕성한 시절이라는 것을 생각한 언어정책도 고려됐는지 묻고 싶다.
모든 교육이 그렇지만 특히 언어교육은 기능적인 면에서 접근하기에 앞서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부터 생각해야 한다. 자라나는 세대들이 생니뽑아 틀니박는 것같은 언어생활에 물들지 않도록 노력한 다음,조기 영어교육같은 문제에 접근해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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