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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운전사의 선행-김연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4면

믿고 살 수 있는 데다 주인들과 집안식구 안부까지 할 정도로 친해진 사이라 이곳 목동으로 이사를 온 뒤에도 전에 살던 동네의 단골집을 찾게되니 시장 가기가 무척 힘들어졌다.
차를 몇번씩 바꿔 타며 단골집을 찾아가기란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사 온지 몇 달이건만 아직도 나는 그 일을 되풀이한다.
며칠 전에도 옛 동네 단골가게를 돌며 필요한 물건보따리를 양손에 사들고 거리로 나오자 서쪽으로부터 회색구름이 잔뜩 몰려오더니 삽시간에 굵은 빗줄기가 줄기차게 쏟아졌다.
소나기려니 생각했는데 장대 같은 빗줄기는 좀처럼 가늘어질 줄을 몰랐다.
비를 맞으며 40여분을 기다려도 버스는 오지 않고 흠뻑 젖은 옷 속으로 으슬으슬한 기가 스며들었다.
생각다 못해 택시를 탈 요량으로 철벅거리는 차도 끄트머리에 내려서서 지나가는 택시를 향해 행선지를 소리쳐도 자라목처럼 쑤욱 뺐던 고개를 두어번 갸우뚱거리다가 빗물을 튀기며 내빼듯 도망친다. 날씨 좋은 날은 88중형택시도 흔하더니만 정작 아쉬울 때 이용하려고 하니 내차지가 쉽지 않았다.
한시간을 고스란히 차도에서 긴장하고 서 있었더니 다리가 뻣뻣했다.
그때 택시 한대가 후진해서 내 앞에 멈췄다. 고마운 마음이 한량 없었다.
연거푸『고맙습니다. 좋은 일하셨으니 복 받으세요』했다.
『복이요. 복은커녕 좋은 일하고 손해보는 일이나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나이 지긋한 기사양반이 대답한다.
차를 운전하고 늦은 밤 골목길을 가다 행인을 칼로 위협하고 있는 강력범을 잡다가 부상했는데 도움 받은 행인은 치료비는 고사하고 차비도 안 되는 돈을 주더라는 것이다. 두달을 넘게 병원생활을 하느라고 천신만고 끝에 장만한 몇푼 안 되는 집마저 없애고 사글세로 내려앉았는데 지금도 후유증 때문에 운전하기가 힘들다는 것이었다.
『내가 위협받는 약자를 돕고싶어 한 일이지만 부상한 경우 사회가 치료비라도 지원해 준다면 이 처럼 가슴이 답답하지는 않겠습니다. 옳은 일을 하면 피해를 보는 사회가 원망스럽습니다.』
운전기사의 하소연을 듣고 있노라니 우리가 나아가는 사회가 빗물에 얼룩진 뿌연 차창처럼 암담하게만 느껴졌다.
이런 현실에서 과연 누가 폭력에 희생되고 있는 이웃을 위해 나설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부당하게 당하고 있는 이웃을 보아도 내가, 내 가족이 아니라는 사실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문단속을 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현실이 슬프기만 하다.

<서울 양천구 목동 신시가지 아파트143동150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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