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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상감령격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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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52년 1월28일 지원사령부로부터 놀라운 통보가 왔다.
적기가 이천 동남쪽 금곡리, 외원리, 용수동, 용소동일대에 조선인민이 이전에 본적이 없는 3종류의 벌레를 투하했다는 것이었다.
3종류의 벌레는 각각 파리·벼룩·빈대 또는 거미같이 생긴 것이었다.
우리는 위생부를 조직해 소독작업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적기는 또 l월29일 파리와 모기같은 것을 이천에 투하했다.
2월11일에는 4대의 적기가 우리 병단 상공으로 날아들어 유상액을 뿌렸다.
이어 시변리와 그 주변마을에서 대규모 파리떼가 종이·옷 등에 유상액을 묻히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으며 우리 부대가 위치한 선녀동 주변에서도 같은 현상이 발견됐다.
의무병의 화확실험 결과 파리·벼룩·거미와 유상액은 콜레라와 기타 병균을 보유하고 있으며, 매우 심각한 상황이라는 사실이 증명됐다.
지원군사령부는 우리에게 적기가 철원·평강·삭령 등지에 투하한 벼룩·파리·모기·귀뚜라미·거미류의 벌레를 실험한 결과 흑사병·콜레라·장티푸스·이질 등 10여 가지의 질병을 일으키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통보하고 예방·살충에 만전을 기할 것을 강조했다.

<김일성 초청 평양에>
세균전 초기단계에서는 어려움이 매우 컸다.
미국은 중국 화북지역의 무순·신민·단동, 심지어 하얼빈시와 청도에도 세균탄을 투하했다.
3월들어 중국은 주은래를 주임위원으로 하고 곽말야과 낭영진을 부주임으로 하는 18명의중앙방역위원회를 구성해 각지에 방역대를 만들고 대량의 왁친과 살충제 개발에 총력을 기울였다.
3월 상순에 조선각지에 5백80만세트의 왁친을 운반, 기본적으로 전선의 수요를 만족시켰다.
우리 지원군은 적의 세균전을 폭로하는 동시에 조선인민과 함께 한편에선 전투, 다른 한편에선 회담, 또 반세균전을 전개하며 한발한발 승리를 쟁취해갔다.
거의 일년에 걸친 고난에 찬 투쟁을 거쳐 52년 겨울에야 우리는 세균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선녀동에 머물던 나는 51년7월l1일 지원군 제2부사령관으로 임명됐다.
당시 팽덕회 사령관은 중국에 있었으며, 제1부사령관 등화와 참모장 해방은 대부분의 일을조선정전회담에 쏟고 있었다.
지원군의 제3부사령관인 홍학지는 여전히 병참사령부가 있는 성천리에 있었고, 한선초동지가 나를 대신해 19병단을 지휘하게 됐다.
나는 제2부사령관에 임명되자마자 19병단의 부사령관 정유산동지를 20병단 총사령관대리로 임명했다.
8월18일 나는 병단을 떠나 회창리에 있던 지원군 사령부로 향했다.
사령부 지휘부는 폐쇄된 금광 속에 있었는데 이상적인 지하벙커였다.
사령부는 팽덕회 사령관의 노력으로 완전한 지하병영으로 바뀌어 있었다.
나의 집무실은 산허리의 엄폐된 동굴 속에 있었고 동굴밖에는 복도와 화장실이 있었다. 이 참호는 뒷산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나의 집무실 왼쪽은 팽덕회의 집무실이었고, 오른쪽은 중조연합군 부사령관 최용건 동지 방이 있었다.
지원사령부에 도착한 뒤 부참모장 왕정주와 사무실 부주임 양풍안은 내게 부대현황을 보고했다.
나는 지원사령부에 온지 얼마되지 않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내각 김일성수상의 초청을 받고 지원군대표들을 대동, 평양으로 향했다.
중국인민지원군의 조선전쟁참가 2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자리가 마련됐다.
우리는 10월22일 평양에 도착했으며 인민군 총참모장 김광협과 총정치국장 최종효 등 동지들이 모란봉에서 우리를 접대했다.
우리는 지하숙소로 안내 받았다. 지하는 광대한 지하성이었다.
조선노동당 중앙·조선정부·인민군최고사령부등 핵심기관이 모두 이곳에 있었다.
이밖에 학교도 있었고 일부인민도 체류하고 있었다.
지원군대표단이 평양에 도착한 22일 저녁에 김일성수상이 직접 우리일행을 접견했다. 이것이 나와 김일성동지의 첫번째 만남이었다.
그는 체구가 크고 풍이 있어 보였으며, 유창한 중국어로 우리 지원군에게 감사의 말을 했다.
10월24일 모란봉 지하 회의장에서 중국인민지원군 전투참가 2주년기념대회가 열렸다.

<이승만도 철원 시찰>
10월25일에는 김일성 수상이 같은 장소에서 7개국대표를 초청한 가운데 지원군대표단을 초대, 성대한 연회를 베풀고 중국측에 감사하는 연설을 했다.
52년 5월 미군의 최고시휘관은 리지웨이에서 클라크로 바뀌었다.
나는 클라크라는 새 상대를 맞아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이 무렵 나는 등화, 감사기, 장문주, 사평 등과 함께 해방 등 회담대표들로부터 정전회담 상황에 대해 보고를 받았다.
우리는 미측이 자신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는 새 군사행동을 할 것으로 예상했다.
8월12일 사령부 참모장인 왕정주는 『적이 새 행동을 취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해왔다.)
클라크·밴플리트와 미군 제1, 9, 10군 사령관및 극동사령부 작전처장이 돌연 미7사단지구를 시찰하는가 하면 15일에는 미공군 187단이 거제도에서 미7사단으로 옮겨왔으며, 17 클라크는 조선전쟁에 참여하고 있는 모든 부대의 이동을 금지했다.
8월20일에는 밴플리트가 이승만과 함께 철원지구 국방군9사단을 시찰했다.
8월 하순이래 일선에서는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큰 전투는 늘 평온속에 숨어있다는 것을 오랜 경험으로 알수 있었다.
이 무렵 미국에서는 대통령선거가 벌어졌는데 아이젠하워도 『당선되면 직접 조선에 와 전생을 종결시키겠다』고 여러 차례 공언했다.
나는 여러 정황으로 보아 적이 정치적 필요와 정전회담을 배합하기 위해 가을공세를 감행할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9월 상순 우리 군은 준비를 갖추고 적의 공격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적의 공격은 없었다. 그러나 이 무력 적정에 변화가 나타났다.
정면의 중부전선에서 적군의 활동이 비교적 활발했다.
이에 따라 9월12일 오후6시 39군, 12군, 68군에게는 3∼5개의 목표를, 기타 각군에게는 1∼4개의 목표를 각각 택해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명령하달 후 우리는 각 병단의 준비상황을 점검했다.
39군의 준비가 완료되자 9월18일 반격을 개시했다.
이로써 우리 정면의 1백80㎞의 진시에시 전면공세가 시작됐다.
제1단계 전술적 반격은 성과리에 l0월5일에 끝냈다.
우리는 계속적인 승리를 위해 제2단계 전술적 반격을 전개했다.
10월6일 해질 무렵 나는 7백60문의 화포지원 아래 1백80㎞ 정면에서 동시에 적의 23개 목표를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전투는 매우 격렬했으며 결과는 만족할만한 것이었다.
21개 목표는 당일에 완전히 점령했고, 계속해서 새로운 목표를 향해 돌진했다. 그런데 15일 오후 오성산일선에 있던 제15군의 봉기위군장과 곡경생정치위원이 상감령지구에서 적들이 맹렬한 공격을 감행해와 상당한 피해를 보았다는 전보를 보내왔다.
이에 따라 나는 당초의 전술적 반격기간인 10월22일까지를 10월말까지로 연장하고 병력을 오성산에 집결시켜 적의 공격을 막고 진지를 지키라고 명령했다. 오성산진지는 사령부의 방어벽이었기 때문에 지원사령부는 전력을 다해 이곳을 지원해야 했다.
전술적인 전투가 전양전체로 확대되어 10월14일부터 11월25일까시 43일 밤낮을 싸운 상감령방어전은 세계전쟁사상 유례없는 기록을 남겼다.
적아 쌍방은 3·7평방㎞의 좁은 지역에 대규모병력을 투입, 지구적인 반복전투를 전개했으며 진두가 전례없이 격렬했다.
특히 포병화력의 밀집도와 지구면적에 퍼부을 정도의 폭탄투하량은 2차 세계대전 때도 유례없던 일이었다.

<미 비로소 회담참여>
상감령전투에서 적은 포탄 1백90여만발, 폭격만 5천여발을 쏘아댔다. 가장 많은 날은 30여만발의 포탄, 5백발의 폭격만이 날아들었다.
이 전투에서 적은 대대급 이상 병력의 공격 25차례, 대대급 이하 병력의 공격 6백50여 차례를 감행했으나 우리도 수십 차례의 반격으로 결국 적의 공격을 분쇄했다.
적은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11월25일 국방군 2사단, 미군9사단을 철수시킨뒤 국방군 9사단과 미군 25사단으로 교체했다.
이 전투에서 적이 입은 물자손실은 50년 한해동안의 손실과 같은 양이었다. 상감령 전투에서 우리가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참호를 근간으로 한 버팀목 방식의 방어체계를 세웠기 때문이다.
이 전투에서 조선인민의 지원도 컸다. 전투개시에시 11월까지 금화군과 회양군의 9개면에서 8천2백37명이 전투및 병참사업에 참가했다.
상감령은 중조인민의 단결의 상징이었다. 이 전투가 끝난 뒤 미군대표는 비로소 판문점회담장으로 나왔다.
해방동지가.나에게 전한 바로는 미군대표가 상감령전투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아 마치지구상에 상감령이라는 지방도 없고 40여일간의 전투도 없었던 것치럼 행동했다고 한다.
상감령전투 이후 클라크는 어떤 군사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그러나 적이 새로운 행동을 취할 가능성이 여전히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에 대비해야 했다. 【번역=이희옥·외국어대 중국어과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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