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 "향수의 본질은 매혹의 완성이죠 남은 물론 나도 유혹할 수 있는"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3면

'새로 나온 향수'를 찾나요. 하지만 '샤넬 넘버5'처럼 사람들 기억에 남아 있는 향수는 있어도 새 향수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향수는 한 브랜드에서 2~3년에 한 번 새 제품을 내놓을 뿐이죠. 다른 화장품처럼 '성능'이 아니라 '느낌'으로 선택되는 것이라 사람들 마음에 드는 새로운 향을 만드는 게 매우 까다롭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향수의 원료인 꽃이나 열매 등을 직접 재배하고 특정 향의 원액을 만드는 곳은 세계적으로 샤넬 브랜드 외에는 거의 없습니다. 그러니 더욱 새 향수는 귀합니다. 그런 향수 시장에 매우 이례적으로 샤넬이 올해 1월 무려 6가지의 새 향기를 선보였습니다. 1920년대 이후 판매된 4가지 향수와 새 향수 6개를 묶은 '레 젝스클루시브(Les Exclusifs)'입니다. 탄생을 총 지휘한 샤넬의 향수부문 최고 조향사(調香師) 자크 폴주를 일본 도쿄에서 만났습니다.

# 시간 여행을 떠나 만든 향수

그는 6개의 향수가 "70년대 샤넬에 온 이후 지금까지 꾸준히 준비해 왔던 것"이라고 입을 열었다. 무엇을 준비해 왔을까. "향수는 우릴 어디론가 데려가야 한다"는 묘한 말도 했다. 샤넬에서 조향사는 단순히 향을 제조하는 '기술자'가 아니라 영감을 얻고 새 향을 창조하는 '예술가'로 여겨지기 때문일까. "활기차게 무언가에 집중하면 시간을 초월할 수 있어요. 그것은 유혹이고 여행이에요." 언뜻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설명은 이랬다.

"'코로망델'은 샤넬 여사가 아끼던 중국 후난 지방 병풍을 보고 영감을 얻었어요". 나무로 만든 중국식 병풍 '코로망델'은 10개의 '레 젝스클루시브' 중 하나의 이름이다. 이 병풍 수집품은 샤넬이 작품활동을 하던 프랑스 파리 캉봉가(街)의 아파트에 지금도 보존돼 있다. "샤넬은 병풍을 사랑했어요. 나무판에 열 번씩 덧칠을 하고 그 안에 드넓은 풍경과 새.나무.꽃 등을 새겨 넣은 병풍은 '작품'이에요. 장인정신이 깃든…."

그가 새 향을 얻기 위해 했다는 '여행'은 이런 것이었다. 샤넬의 아파트에 놓여 있는 병풍과 함께 몇 십 년을 거슬러 올라가 그 시대 샤넬이 사랑했던 동양 병풍의 느낌을 향에 담았다는 것이다. 이런 '시간 여행'을 통해 그는 파리 외곽에 있던 샤넬의 별장 '벨 레스피로'의 20년대 전원 분위기,'캉봉가 31번지'의 예술향기 등을 향수에 녹여 냈다.

# '특별한 코' 아니라 '지독하게 훈련된 코'

자크 폴주는 70년부터 지금까지 40여 년간 '샤넬의 코'로 불려 왔다. 조향사는'향을 만드는 사람'이다 보니 여러 향을 기억하고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조향사가 되려면 수많은 향료에 따라 냄새의 미세한 차이점을 구별하고, 향료의 성분까지 알아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는 수많은 향을 다 기억할까. "물론입니다. 향을 섞었을 때 어떤 향이 나올지도 상상할 수 있죠." '상상의 비법'은 무엇일까. 그는 뜻밖에 '평범한 진리'를 꺼냈다. "저라고 '특별한 코'를 가진 것은 아니에요. 사람 코야 다 똑같죠. 저도 연구소에 있는 병마다 분류별로 메모를 꼭 붙여 놓죠. 향의 자세한 느낌 같은 것 말이죠. 아주 열심히 훈련한 것뿐이에요."

인체 기관 중 자극에 가장 민감해 제일 빨리 마비되는 감각이 후각이다. 그러면 하루 종일 향에 둘러싸여 사는 그는 어떻게 감각을 되살릴까. 이 대답 역시 평범했다."자주 주변 환경을 바꿉니다. 예를 들어 밖에 나가 산책을 하고 신선한 공기를 맡는 것이죠." 그렇다면 예민한 코를 유지하기 위해 당연히 담배는 피우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물었다. "담배 안 피우시죠?"

"피웁니다." 가수가 목 관리에 신경 쓰듯 조향사는 코를 위해 금연할 것이란 예상이 빗나갔다. 대가(大家)는 '특별한 비법'보다 '기본적 원칙'을 강조했다.

# '내 손안에 들어오는 신비감'

자크 폴주는 '내 손안에 들어오는 신비감'이란 말로 향수를 정의했다. "향수는 매혹적인 여성을 완성합니다. 단순히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도 유혹할 수 있는 매력이요." 패션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만족을 추구하는 것이 향수의 본질이란 말이다. 마릴린 먼로가 잠자리에서 잠옷 대신 향수 '넘버 5'를 입었던 것처럼.

최고 조향사가 생각하는 요즘의 향수는 어떤 것일까. "전엔 '꽃향기=여성'일 만큼 성별 구분이 있었어요. 시대는 바뀌었습니다. 여자가 바지를 입듯 남성 향수를 찾는 여성의 모습도 자연스러워진 거죠."

그렇다면 그는 80년대를 풍미했던 '유니 섹스'가 최근 경향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결코 '유니 섹스'는 아닙니다. 여자 향수에 남성적인 특징을 넣고 남성용 향수에는 섬세함이 깃든 식이죠." 그는 "각자의 온전한 개성을 최대한 살리는 것이 가장 향기로울 수 있는 방법"이라고 말을 맺었다. 역시 진실은 먼 곳에 있지 않았다.

도쿄=조도연 기자

'샤넬 넘버 5' 비밀은
장미.일랑일랑.재스민 + 알데히드
휘발성 인공향 최초로 섞어 넣어

아침에만 꽃 수확

장미와 일랑일랑, 그리고 재스민이 주원료다. 장미는 향수의 도시라고 불리는 프랑스 남부 그라스 지방의 '로자 상티폴리아'라는 마을의 농장에서 채취한다. 햇빛으로 꽃이 시들기 이전인 아침에만 수확한다. 재스민 역시 그라스 지방에서 9월에만 수확하며, 일랑일랑은 아프리카의 마다가스카르 등에서 5~6월에 주로 채취한다. 원료를 수확하는 모든 농장은 샤넬과의 독점 계약을 통해 철저한 품질관리를 받는다.

농축액 150g 만드는 데 꽃 100㎏ 필요

채취한 꽃잎은 바로 밤(balm: 농축 고체) 형태로 만들어진 후 다시 앱솔루트(액체 농축액)로 변환된다. 농축액 1.5㎏을 만드는 데 필요한 꽃의 양은 무려 1t. 넘버 5는 자연 향과 인공 물질인 알데히드가 조화된 최초의 향수다. 알데히드는 휘발성 합성물질로 꽃 향기가 잘 퍼져 나가도록 도와 준다. 앱솔루트에 알데히드와 알코올 등이 첨가돼 향수 액이 만들어진다. 출시 당시 자연의 향에만 익숙해 있던 여성들에게 인공 향이 가미된 넘버 5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이유다. 여태껏 맡아 보지 못한 전혀 새로운 향이었다.

유리병에 숨은 과학

넘버 5의 용기는 그 향 못지않게 유명하다. 각진 유리병에 심플한 라벨이 붙어 있는데 자세히 보면 검은색 실과 밀랍 스탬프가 찍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넘버 5에서만 사용되는 '보드뤼사주(baudruchage) 봉합 법'이다. 향의 보존을 위해 병의 입구 주위에 얇은 막을 대고 두 줄의 검은색 면실로 묶은 다음 밀랍 봉인으로 샤넬의 더블 C 로고를 찍는다.

조도연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