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이오지마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한 장의 사진이 백 마디의 연설보다 더 큰 위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종군기자의 사진이 특히 그러함은 베트남 전쟁에서 여실히 입증된 바다. 네이팜탄으로 불바다가 된 거리를 알몸으로 내달리는 소녀의 절규를 포착한 사진은 반전 운동의 불길에 기름을 끼얹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한 장의 사진이 애국심을 고취했다. 미군 병사 여섯 명이 바위산에 성조기를 매단 깃대를 세우려고 안간힘을 쓰는 장면이다. 치열한 전투를 끝내고 고지를 점령한 승자의 영광이 읽힌다. 한국전쟁 때 서울을 수복한 국군 병사가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장면을 담은 사진처럼.

촬영지는 사이판과 일본 본토의 중간지점인 화산섬 이오지마(硫黃島), 때는 1945년 2월 23일 정오 무렵이다. 서울 용산구 넓이에 불과한 섬을 빼앗기 위해 미군은 5000여 척의 함정과 6만1000명의 해병대원을 투입했다. 닷새 만에 끝낼 수 있다던 미군의 기대와 달리 전투는 36일간 계속됐고 미군은 6800명의 희생자를 냈다. 일본군은 2만1000명 가운데 2만 명이 숨졌다.

이오지마의 사진은 미 해병대에서 용기와 단결심의 상징물로 지금도 쓰인다. 사진의 주인공 가운데 생존자 세 사람은 당시 국민적 영웅으로 떠받들어졌다. 그러나 사진은 '연출'된 것이었다. 그들은 빗발치는 총탄을 뚫고 최전선을 돌파한 영웅이 아니었다. 처음 게양된 성조기를 누군가가 기념으로 떼어 가는 바람에 허겁지겁 불려가 종군기자 앞에서 깃대를 세운 데 지나지 않았다. 55년이 지난 뒤에야 밝혀진 사실이다.

하지만 전시엔 영웅이 필요했다. 미국 정부는 전쟁 국채 모금 캠페인에 사진의 주인공들을 동원했다. 전쟁이 끝나자 '억지 영웅'들은 모두 양심의 가책을 안고 굴곡진 삶을 살았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은 이를 바탕으로 영화 '아버지의 깃발'을 만들었다.

특이한 것은 그가 일본군의 시점에서 또 한 편의 영화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를 동시에 만들었다는 점이다. 여기엔 미군과의 전투에서 이길 수 없음을 뻔히 알고 고뇌하는 지휘관과 원치 않는 전쟁에 끌려온 병사의 갈등이 그려져 있다. 종래의 전쟁영화에서 보아온 가미카제 특공대식의 일본군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두 편을 관통하는 메시지는 반전이다.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는 지난주 발표된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올랐다. 때마침 미국의 이라크전 증파가 발표된 시점이다. 미국적 가치관의 대변자인 할리우드의 축제가 반전 영화를 어떻게 평가할지 주목된다.

예영준 도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