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영화] 서스펜스 영화 '싸이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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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과연 누구일까. 현대인들이 수시로 부딪치는 이 존재론적 물음을 '토탈리콜'을 비롯한 공상과학 영화들은 훌륭한 오락적 장치로 활용해왔다. 28일 개봉하는 영화 '싸이퍼'역시 바로 이 물음에서 출발한다.

지루한 일상을 살고 있던 주인공 모건 설리반은 다국적 기업'디지콥'의 산업스파이가 된다. 모건은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가 첫 임무에 나서지만 별반 어려운 일은 없다.

주어진 티켓으로 비행기를 타고 각종 산업세미나 현장에서 만년필에 내장된 데이터 전송 도구를 남몰래 켜두는 것만으로도 임무는 매번 성공적으로 완수된다. 그런데 수상하다. 시시콜콜한 소비자 조사 따위를 들먹이는 졸리기 짝이 없는 세미나가 과연 스파이가 활약할 만한 무대인 것일까. 정체불명의 여인 리타는 실은 이것이 세뇌를 통해 이전의 자아를 온전히 잊게 하려는 음모라는 것을 알려준다. 악몽 같은 현실에 빠진 모건에게 또 다른 기업'선웨이'는 이중스파이 노릇을 제안한다. 모건은 어느 쪽도 온전히 믿을 수 없고,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한다.

'싸이퍼'는 치밀한 아이디어가 돋보인 저예산 영화'큐브'(1997년작)로 우리 관객에게 호평을 받았던 빈센조 나탈리 감독이 오랜만에 내놓은 신작이다. 감독은 영화의 재미가 제작비에 비례하는 것은 아니라는 지혜를 여전히 잊지 않고 있다. 예컨대 만년필이나 담배필터 같은 일상의 소품을 스크린에 커다랗게 확대해 보여주는 손쉬운 기법만으로도 모건을 둘러싼 불안한 정서를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무엇보다도 '싸이퍼'는 서스펜스 영화다. 주인공 모건이 누구도 믿을 수 없는 불안한 처지에 점점 깊숙이 빠져드는 과정은 이를 지켜보는 관객이 잠시도 마음놓을 틈을 주지 않고 긴장감을 이어간다. 이런 긴장의 밀도에 비하면 막판 반전 이후의 첨언은 싱거운 편이다. 대신 이를 보고 나면 '고스포드 파크''엠마'등에 나왔던 영국배우 제레미 노담이 정체성의 위기를 겪는 주인공 모건을 얼마나 잘 형상화했는지 확신할 수 있다. 다만 세뇌 같은 소재는 어느 공상과학영화에서고 본 듯한 소재여서 감독의 독창적인 철학까지 기대하기는 어렵다. 15세 이상 관람가.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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