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너리티의 소리] 화폐에 여성인물 왜 안쓰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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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한 정치가에서부터 가난에 찌든 반 고흐의 삶에 이르기까지 돈은 많거나 적거나 간에 모든 사람의 삶에서 필요 불가결한 수단이다. 화폐는 종이나 금속으로 만들어진 물건에 불과하지만 이것이 우리 모두의 삶의 중심에 있는 것은 돈의 가치성.상징성을 누구나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종이나 금속에 불과한 화폐에 가치성.상징성을 부여하는 데에는 화폐의 도안이 중요한 몫을 한다. 세계 각국의 화폐에는 그 나라가 내세우고 싶어 하는 인물이나 사물을 상징으로 그려 넣음으로써 화폐의 권위를 더욱 돋보이게 하고 동시에 이를 통해 자신들의 자부심을 전 세계에 펼쳐 보인다.

우리나라 화폐에는 세종대왕.이율곡.이퇴계.거북선.다보탑.벼.학이 그려져 있다. 남성과 동물.식물.문화재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상징인 셈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화폐에 여성은 없다. 이는 우리 사회에서 여성은 오랫동안 있으되 없는 존재로 취급돼 왔음을 반영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여성은 남성과 더불어 우리 사회를 이끌어온 주역으로서 전통사회에서 여러 가지 제약 속에서도 가족을 위해 헌신했을 뿐만 아니라 여러 방면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고 사회 발전에 공헌했다. 역사 속의 대표적 여성으로 대부분 신사임당이나 유관순 정도를 기억하고 있지만 이 두 여성 외에도 높이 평가돼 마땅한 여성이 많이 있다.

예를 들면 최초의 여성 변호사로서 한국가정법률상담소를 설립해 고통받는 수많은 여성과 어려움을 함께 했고 가족법 개정 노력을 통해 가족 내의 여성 차별을 없애는 데 앞장섰던 이태영, 조선조 기생 출신으로 사업에 성공한 후 그 재산을 제주도민을 기근에서 살려내는 데 아낌없이 쓴 김만덕, 불운한 천재 시인 허난설헌, 신라시대 최초의 여왕으로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한 선덕여왕, 봉건적 가부장제에 온몸으로 저항한 최초의 서양화가 나혜석, 만주 벌판에서 말달리며 쌍권총을 일본군을 향해 쏘아대던 항일독립투사 김마리아 등 그 업적이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거나 잊혀져 가는 여성이 많이 있다.

우리 사회가 학이나 벼보다 우리나라 여성이 자랑스럽지 못하다고 생각해 화폐에 넣지 않은 것은 아닐 것이다. 이러한 훌륭한 여성을 화폐에 넣어 업적을 기릴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을 뿐일 것이다. 역사 속 여성을 재평가해 화폐에 여성인물을 새겨 넣음으로써 이들이 우리 사회에 끼친 공헌에 대해 국민 모두가 감사하는 마음을 공유하고, 또 전 세계를 향해 자랑스럽게 소개한다면 오늘을 사는 여성들에게는 자긍심을 심어 주는 일이 될 것이다. 또 여성에게 사랑의 빚을 지고 있는 남성들에게는 자신의 어머니와 딸.누이.아내에게 사랑과 감사를 표하는 기회가 될 것이며, 미래 세대 여성들에게는 역할 모델을 제시함으로써 꿈을 키워 더욱 힘차게 미래를 개척하게 하는 동력으로 작용할 것이다.

영국과 영연방이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미국이 여성해방운동가 수전 앤서니를, 프랑스가 퀴리 부인을 각각 자기 나라 화폐에 넣는 등 수많은 나라가 여성인물을 화폐에 그려 넣고 있다. 최근 일본은 2004년에 메이지시대 여성소설가 히구치 이치요(1872~96)의 초상을 넣어 화폐를 발행하기로 결정한 바 있다.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화폐에 들어갈 만한 자격 있는 여성이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만이 유독 우리 사회에 공로를 끼친 여성들을 평가하는 데 인색하다고도 믿지 않는다.

이제 우리나라도 여성인물을 화폐에 넣자!

김경애 동덕여대 교수.여성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