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왕 부부, 5년 전 약속 지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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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히토(明仁) 일왕 부부(右)가 26일 고(故) 이수현씨의 추모 영화 ‘너를 잊지 않을 거야’ 시사회장을 찾아 이씨의 부모를 위로하고 있다. [도쿄 교도=연합뉴스]

아키히토 일왕 부부가 26일 고 이수현(사진)씨 부모에게 한 작은 약속을 지켰다. 이씨는 6년 전 도쿄의 한 지하철역 선로에 떨어진 취객을 구하고 자신은 숨졌다. 일왕 부부는 이날 그의 6주기를 맞아 한.일이 합작해 만든 추모영화 시사회에 참석했다. 일왕 부부가 영화 시사회에 참석한 것은 처음이다.

'너를 잊지 않을 거야'라는 제목의 이 영화는 이날 오후 도쿄 일본소방회관에서 공개됐다. 아키히토 일왕은 이수현씨가 숨진 이듬해 고인의 부모를 도쿄 왕궁으로 초청해 위로했다. 이때 이수현씨 추모영화가 만들어지면 시사회에 꼭 참석하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이씨의 일대기를 그린 이 영화는 27일부터 일본 전역에서 개봉된다.

영화 제작사 측은 "일왕 부부가 의인 이씨의 행동에 감동받았고, 이런 영화가 양국 관계 개선과 평화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해 시사회에 참석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날 행사는 추모영화에서 고인의 역을 맡은

이태성씨와 아버지역의 정동환씨, 어머니역의 이경진씨 등 배우들의 인사와 일왕 부부 입장, 시사회, 추모회 순으로 진행됐다. 주연 배우 이태성씨는 "영화를 촬영하는 동안 이수현씨가 하늘나라에서 돌봐주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며 "오늘 이 시사회장도 지켜보고 있으리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씨의 연인역은 일본 인기가수 마키가, 감독은 하나도 준지(花堂純次)가 각각 맡았다. 영화를 기획.제작한 프로듀서 미무라 준지는 "왜 이수현씨가 이국땅에서 자신의 생명을 바치면서까지 모르는 사람을 도우려 했는지를 그리고 싶었다"고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추모제 행사에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부인 아키에(昭惠) 여사와 모리 요시로(森喜朗) 전 총리,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전 관방장관, 일본 프로야구 스타 장훈씨 등 유명 인사들이 대거 참석했다. 아키에 여사는 한류(韓流) 팬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객석은 600여 명의 초청 인사로 가득 메워졌으며 영화가 상영되는 내내 숙연한 분위기였다.

고 이수현씨 추모 영화 포스터.

일왕 내외는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특별 시사회가 끝난 뒤 일왕 내외는 이수현씨의 부모와 이야기를 나눴으며, 이 자리에서 미치코(美智子) 왕비는 "훌륭한 아드님을 두셨다"고 위로했다.

이달 12일에는 도쿄의 대형 공연장인 부도칸(武道館)에서 7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추모 콘서트가 열렸다.

도쿄의 한 외교 소식통은 일왕이 한국 관련 민간 행사에 참석한 것에 대해 '일본 왕실이 한.일 관계의 개선을 희망하고 있다'는 의지를 보여주려는 뜻으로 풀이했다. 그는 일왕의 이런 행보가 야스쿠니(靖國)신사를 참배하는 일본 정부 요인들이나 우파에 무언의 압력으로 작용할 수도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일 왕실의 한국 관심=이에 앞서 나루히토 (德仁) 왕세자는 22일 도쿄에서 열린 '한.중.일 우정의 가교 콘서트 2007' 행사에 연주자(비올라)로 직접 참여했다. 연주를 마친 뒤 그는 무대에 올라 "대단히 귀중한 경험을 얻어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한.중.일 3국 우호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라고 이례적인 즉석 연설을 하기도 했다.

도쿄=김현기 특파원

◆고 이수현씨=고려대를 휴학하고 일본에서 유학 중이던 2001년 1월 26일 도쿄의 신오쿠보 역에서 선로에 떨어진 일본인 취객을 구하고 자신은 목숨을 잃었다. 당시 26세였다. 그의 살신성인은 많은 일본인에게 감동을 안겨주었고, 모리 요시로 당시 총리가 빈소에 조문하는 등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후 한.일 양국에서 그의 희생정신을 기리며 의인(義人)으로 추모하는 물결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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