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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활동에 보안법 적용 쟁점-서사연연구원들 구속파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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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서울사회과학연구소(소장 김진균 서울대교수) 연구원 구속사건이 진보적 학계에 광범한 위기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위기감이 확산되는 것은 사건자체가 연구활동의 생명인「학문과 사상의 자유」에 관련되어 있을 뿐 아니라, 진보학계에 대한 최초의 국가보안법 적용이라는 점이다. 학계는 최근 국가보안법이 적용범위를 엄격히 제한하는 방향으로 개정됐음에도 법개정 이전에도 관행적으로 처벌하지 않던 학술활동을 이적 표현물로 규정해 대량 구속한 것은 국가보안법적용 확대의도나 기본권 탄압으로 보고있다.
국회는 지난달 10일 국가보안법상의 「이적」조항을 「반국가 단체를 이롭게 하는 행위」에서 「국가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행위로 바꾸고 「찬양·고무」조항도 「국가의 존립이나 자유민주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할 것을 알 때」만으로 축소하는 등 국가보안법 적용을 엄격히 하도록 개정안을 통과시켰었다.
학술단체들은 정부가 보안법 적용 범위를 축소하는 방향으로 개정한 직후 진보학술 활동에 족쇄를 채운 것은 「법은 개정됐지만 운용 방법이나 적용 대상은 달라질 수 없다」는 사실을 「본보기」로 나타냄으로써 향후 보안법 적용범위를 확대하려는 의도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번 사건이 진보적 학술활동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 사법조치라는 점은 더욱 충격적이다.
89년 공안당국이 충북대 서모 교수의 연구논문을 문제삼아 수사를 벌인 적이 있으나 내사수준으로 끝나 연구활동이 국가보안법의 적용을 받아 구속된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학계는 이번 사건이 80년대 후반 이후 급속히 성장해온 진보적 학술단체에 사법적 이적성여부를 시험하는 리트머스 시험지를 들이댄 것과 같다고 본다. 이번 시험에서 「이적」으로 판명될 경우 진보학계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이적의 부담을 다소간 안게될 것이다.
왜냐하면 문제가 된 서사연의 단행본『한국에서의 자본주의 발전』등에 실린 글들이 80년대 중반 이후 진보학계를 들끓게 했던「사회구성체 논쟁」의 연장선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87, 88년 활발했던 논쟁 과정에서 이미 나올 얘기는 다 나왔으며, 이번의 책들은 당시 논의된 것들을 다소 보완한 선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당시 논쟁의 대표 논객이며 서사연의 창립 멤버인 박태호씨(필명 이진경)는 이미 지난해 초 지하조직 「노동계급」과 연루돼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됐다.
서사연은 논쟁에서 「신 식민지 국가독점 자본주의론」을 주장하는 민중민주주의(PD) 노선을 고수해왔다.
서사연은 83년 당시 해직교수였던 김진균소장의 개인 연구실로 출발, 지난해 3월 교수 20여명을 포함해 70여명의 사회과학 연구자들이 대거 참여해 「연구소」로 발족했다. 발족 이전부터 서사연은 「식민지 반봉건 사회론」을 비판하는 「신 식민지 국가독점 자본주의론」 을 연구하고 주장하며 논쟁의 주역을 맡았었다.
이들 논쟁은 우리 나라의 자본주의 성격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평가를 둘러싼 것이다. 「신 식민지 국가독점 자본주의론」이란 우리사회가 외세(미국·일본)에 종속된 제한적 상태에서 발전하면서 반민주적 국가지배 체제가 강화된 파행적 자본주의라는 것이다. 그 결과 점차 대외 종속성이 심화되고 자본과 권력의 독점화도 강화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대미 종속성을 강조해 우리사회를 미국의 식민지로 보는 「식민지 반 봉건사회론」, 이와 맥을 같이하는 「주사파」를 비판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대외 종속적이지만「식민지」와 다르며 나름의 자본주의적발전을 이뤄왔다고 주장, 이론의 내용도 훨씬 복잡하다.
대학 운동권에서는 주사파가 주도권을 행사함에도 불구하고 대학원 이상 소장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서사연의 이론이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 이론으로 인정받아 왔다. 그러나 최근 사회주의권의 대변혁이후 학계에서 서사연의 이론이 상당한 비판을 받고 있으며 주사파 이론은 아예 외면당하고 있는 추세다.
공안당국은 서사연에서 펴낸 『한국에서의 자본주의 발전』(새길 출판사 펴냄)등 연구서적 두권과 이들의 학위논문이「사회주의 혁명을 부추긴다」고 보고있다.
공안당국은 이번 사건과 관련, 구속영장 발부에 필요한 기본적 혐의사실을 제외하고 아직 자세한 범죄사실 발표를 하지 않고 있다.
「이적성」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기본권 탄압, 보안법 확대적용 의도라고 말하고 있는 학계의 주장에 당국이 어떤 이론과 근거로 대응할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오병상·이규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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