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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석씨 옛날 이야기를…』|밀도 있는 문체로 유년의 공간 촘촘히 떠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5면

주인석씨의 소설 『옛날 이야기를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단다』(『문학과 사회』여름호)는 서울에 살고 있는 한 젊은 소설가가 오랜만에 자신의 유년기가 담긴 고장 파주를 여행하고 돌아온 하룻 동안의 행정을 그린 작품이다. 유년기를 향한 여행의 이야기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우선 많은 사람들의 공감대를 자극할 수 있는 기본적 요건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유년에 대한 향수와 회한의 공간을 가슴속 깊은 곳에 은밀히 간직하고 있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단순히 그러한 보편적·심정적 차원에서의 유년 탐구로 그 의미를 한정시키지 않고, 다시 거기에 두 가지 중요한 사항을 덧붙이고 있다. 그 첫째는 이 작품 속에서 주인공이 찾아가는 곳이 기지촌으로 잘 알려진 경기도 파주로 되어 있으며 작가는 이러한 지리적 특징을 최대한 활용함으로써 이 작품을 분단의 질곡에 대한 섬세한 성찰의 기록으로 끌어올리는 데 성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둘째는 작가가 이 작품의 주인공을「구보씨」라는 별명을 가진 소설가로 설정하고 그 주인공으로 하여금 문학의 의의에 대한 진지한 탐구를 행하도록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이처럼 유년을 향한 여행이라는 기본 틀에다 다시 분단의 질곡에 대한 성찰과 문학의 의의에 대한 탐구라는 면모를 결합시킴으로써『옛날 이야기를…』는 하나의 복합적인 세계를 구축한 셈이거니와 이 복합적인 세계는 또한 상당히 밀도 있는 문체에 의해 튼튼히 뒷받침되고 있어 독자들에게 모처럼 뜻있는 몰입의 시간을 선사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그런데『옛날 이야기를…』에서 특히 흥미로운 것은 이 작품이 「소설가 구보 씨의 하루 1」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으며, 그와 같은 부제에 걸맞게 주인공인 소설가에게 구보 씨라는 별명을 붙여 등장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주지하다시피 일찍이 1930년대에 박태원씨에 의해 『소설가 구보씨의 1일』이라는 작품이 처음으로 씌어진 바 있고, l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까지에 걸쳐 최인훈씨가 역시 이 제목으로 열다섯편의 연작을 쏜 일이 있다. 그러니까 주인석씨는 이번에 『옛날 이야기를…』라는 작품을 발표함으로써 박태원·최인훈씨에 이어 제3대의 소설가 구보 씨를 만들어 내는 작업에 착수한 셈이거니와(오규원 씨가 만들어낸 시인 구보 씨는 여기서 일단 논외로 하자), 이로부터 우리는 금방 한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으니, 그것은 주인석 씨라는 젊은 작가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패기의 높이가 결코 만만치 않은 것이라는 사실이다. 왜 이런 얘기를 할 수 있느냐 하면, 『소설가 구보 씨의 1일』이라는 기본 틀을 다시 들고 나옴으로써 주인석씨는 박태원·최인훈씨와 어깨를 겨루어야 하는 위치에 자기를 놓은 셈인데, 신예급의 작가가 이런 행동에 나선다는 것은 자못 대단한 패기가 전제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게 누가 보더라도 명백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주인석씨는 『옛날이야기를…』에서 그러한 패기에 어울리는 성과를 거두었는가. 이 물음에 대해서나는 충분히 긍정적인 대답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동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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