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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최대 의료재단 카이저 병원 교포의사 김항선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7면

재미교포 의사 김항선 박사(56·내과)는 미국 의학계에서 보기 드문 이변을 일으킨 「의지의 한국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지난 20일 동양인으론 처음으로 미국 최대인 카이저 의료재단 소속 벨플라워 지역 병원장으로 선출되는 쾌거를 이뤄냈기 때문이다.
1946년 병원설립 이후 반세기동안 쟁쟁한 백인의사들의 독무대였던 이 재단은 미국 전역에 「카이저」라는 이름을 가진 30개의 병원을 두고 있다. 그가 6년 임기의 원장이 된 곳은 남가주 벨플라워(로스앤젤레스에서 차로 20분 거리)에 위치한 벨플라워 카이저 병원.
그는 2백20만명의 회원 환자를 둔 남가주 소재 10개 카이저 병원 2천5백명의 의사를 대표해 투표한 3백여명 의사 중 97%의 압도적 지지를 얻어 최종 경쟁상대였던 미국인 의사에게 이겼다.
그에게 기쁨을 안겨준 의사들의 80∼90%는 물론 유난히 자부심·배타심이 강한 백인 의사들이다.
『동양인이라는 약점 때문에 동료의사들과의 평소 친분은 투표결과와는 별개라고 생각하면서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는 그는 『의외의 결과가 인간의 진한 의리를 맛보게 해 준 것 같아 가슴이 뻐근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내년 초부터 임기가 시작되어 30만명의 등록환자, 4백여 개의 병실, 18개 과 4백50명의 의사집단을 이끌어 가는 행정책임자가 된다.
서울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의예과 1학년을 마친 의학도 김항선은 「선진학문」에 이끌려 37년 전인 지난 54년 미국으로 떠났다.
젊은 패기를 밑천으로 접시 닦기·청소·밤샘근무 등을 마다 않고 필라델피아 하니먼 대학에서 공부에 몰입했던 그에게 오늘의 보람을 선사한 원동력은 한 미국인 급우의 경멸과 조롱이었다는 것.
영어도 더듬거리는 유색인종이 뭘 믿고 의사공부를 하느냐는 듯 『당신, 상원의원 아저씨라도 둔 모양이지』라는 빈정거림이 그를 스스로 모질게 채찍질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20여 년간의 캘리포니아 어바인 대학 객원교수, 카이저 병원 내과과장·부원장을 지내면서 그는 어느덧 미국 의사들의 존경을 받는 갑상선의 권위자로 우뚝 섰다.
그는 어떻게 원장이 될 수 있었느냐는 질문에 『근면·솔직하고 의리를 지켜야한다는 평소 생활신조를 아이들에게 가르치며 행동에 옮기려고 노력했기 때문인 것 같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한번의 의료실수 없이 8년간 내과 과장직을 수행한 점, 편견 없는 판단력, 미국인들을 압도하는 리더십, 출중한 언어 구사력이 큰 밑받침이 되기도 했다.
결코 요란하지 않는 그의 담담한 표정과 말, 편안함이 그가 진정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음을 내비쳐준다.
2남1녀의 아버지인 그는 섬유공예가인 아내 고미군씨(49)의 서울전시회를 앞두고 휴가 차 내한, 서울에 머무르고 있다. <고혜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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