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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정 넘친 '사랑의 뒤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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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금호1동사무소 직원들이 기탁받은 쌀을 뒤주에 채우고 있다. [사진=프리랜서 장정필]

전남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에는 조선 영조 52년(1776년)에 낙안군수 류이주가 지은 99칸짜리 양반 가옥인 운조루(雲鳥樓)가 있다. 이곳에는 쌀을 꺼내는 구멍의 마개에 '누구든 마음대로 쌀을 퍼갈 수 있다'는 뜻의 '他人能解(타인능해)'라는 글씨가 새겨진 뒤주 하나가 있다. 운조루의 주인이 마을 사람들에게 베푼 쌀이 한 해 수확량의 20%나 됐다고 전한다.

광주시 서구 금호1동사무소가 운조루의 뒤주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운영하는 '사랑의 쌀 뒤주'가 25일로 설치 한 돌을 맞는다. 뒤주 위에는 '미안해하거나 부끄러워하지 말고 따뜻한 밥을 지어 드세요'라고 써 붙여 놓았다.

동사무소에 따르면 이 뒤주에서 지난 한 해 동안 80㎏ 들이 137가마에 해당하는 1만1000㎏의 쌀이 나갔다. 혼자 사는 노인이나 장애인, 소년소녀가장 등 하루 20여 명이 한 번에 2㎏ 안팎씩 퍼다 밥을 지어 먹은 것이다. 연인원으로 따지면 5000여 명이 혜택을 봤다.

이 뒤주의 쌀은 동사무소가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는 또 다른 이웃들이 채우고 있다. 금호1동에 있는 병원.할인점.건설회사.교회 등이 뒤주의 바닥이 채 보이기도 전에 새 쌀을 보충해 주고 있다. 자신의 신분을 감춘 채 다달이 20㎏ 짜리 10부대를 보내주는 사람도 있다.

지난 한 해 동안 뒤주를 채우라고 답지한 쌀과 성금은 2700여만원 상당(쌀 8776㎏과 현금 973만원)에 이르고 있다. 기탁받은 현금은 동사무소가 쌀을 사서 빈 뒤주를 채우고도 현재 600여만원이나 남아 있다.

사랑의 쌀 뒤주는 다른 지역으로도 확산, 광주에만도 남구 주월동.백운2동.월산5동 동사무소와 서구 화정3동 동사무소 등도 뒤주를 운영하고 있다. 또 다른 시.도 지방자치단체의 벤치마킹이 잇따르고 있다.

금호1동사무소 주민생활지원팀의 이영호(50)씨는 "우리 동은 빈부의 격차가 심하지만, 생계가 아주 어려운 사람들도 사랑의 쌀 뒤주 덕분에 최소한 쌀 걱정은 하지 않고 살고 있다"고 말했다.

광주=이해석 기자
사진=프리랜서 장정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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