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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당과 「일해당」(분수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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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만해 한용운이 어떤 분이던가. 일제식민치하에서 일본에 항거하다가 비극적인 생을 마친 애국지사중 첫손꼽히는 인물로 우리는 서슴없이 그를 내세운다.
일찍이 의병항쟁에 투신해 나이 겨우 18세때 군자금 마련을 위해 고향인 홍성호방의 관고를 털어 돈 1천냥을 탈취하면서부터 항일역정은 시작된다. 그의 민족사상의 본격적인 실천은 3·1운동 때의 활약을 통해서였다.
만해는 최린을 포섭하고 그를 통해 손병희를 설득해 33인을 규합했던 것이다. 처음에 천도교나 기독교측이 독립선언 아닌 독립청원으로 하자고 주장했을때 이를 반박하고 독립선언으로 한 것,육당이 기초한 선언서중 불만스런 부분을 수정·가필한 것,공약삼장에 「최후의1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등을 첨가한 것도 모두 만해의 활동이었음은 다 아는 사실이다.
만해는 동학의병이 실패하자 설악산 오세암에 들어갔다가 백담사에서 연곡 스님으로부터 계를 받아 승려가 되고 만화 스님에게서 법을 받았다. 『불교대전』을 저술했고 대승불교의 반약사상을 기초로 해 종래의 무력하고 은둔적인 불교를 개혁하자는 조선불교유신론을 주창하고 현실참여를 주장했다. 그는 민족자존,자주독립과 불교혁신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위업을 추구한 우리의 선각자요,선구자였다.
백담사에는 이런 만해가 계와 법을 받고 수도를 하던 사실을 기리기 위한 만해당이 있다. 그 유서깊은 요사채에 5공대통령 전두환씨 내외가 2년여 은둔생활을 한 것에 대해서는 시비가 많다.
전두환씨가 누구던가. 이른바 5공비리의 장본인으로 국민지탄의 대상이었다. 권위주의와 강압통치의 상징처럼 아직도 널리 회자되고 있는 인물이다. 그런 그가 하필이면 만해당 피신이냐는 것이었다.
그런데 최근에 그 만해당이 전씨 귀가 이후 그들 부부가 은둔생활때 쓰던 물건들의 전시관으로 둔갑해 버렸다는 소식이다. 그들이 쓰던 이불,목욕통,물통 등이 통유리로 차단된 방안에 전시되고 마루 벽에는 그곳에서의 생활모습이 담긴 사진들이 걸려있다고 한다. 백담사측 얘기는 비서관들이 만들었다고 전한다. 1천3백년 역사를 지닌 신라고찰이 「부덕한」 한 개인의 사설기념관이 돼버리다니­. 만해가 지하에서 혀를 찰 일이다. 이들이 만해당을 전씨의 호를 따서 일해당으로 현판을 바꾸지 않은 것 만도 다행이라고 보고만 있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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