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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의 깃발」 세우겠다”/김동길씨 인터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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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일선이든 이선이든 이제 정치에 참여/「평등 새바람」 일으킬 사람 모으고 있다
시·도의회선거에 참패한 신민·민주 등 기존야당의 통합작업은 처음부터 벽에 부닥친 느낌이다.
이런 기성정계의 신물나는 행태에 대한 역작용으로 새로운 정치바람을 모색하는 움직임들이 저류처럼 흐르고 있다.
이제는 인물중심의 보수정치를 청산하고 평등가치를 실현할 새로운 정치세력들이 한 「깃발」아래 모일 때라고 김동길 전연세대교수(63)도 그런 흐름 가운데 있다.
김교수는 『정치의 일선이건 이선이건 참여하겠다』는 분명한 「정치선언」을 하고 『이제 학교마저 떠난 마당에 조국을 위한 마지막 서비스를 하겠다』고 밝혔다.
미국 강연중 잠시 귀국한 그를 연세대후문쪽 「정자있는 2층집」 서재에서 만났다.
­이번 선거에서는 중산층의 보수화현상을 뚜렷하게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20∼30대 젊은 유권자들이 투표를 기피하기도 했구요.
『민자당을 키워 일을 잘 하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반영된 것은 아니라고 봐요. 따라서 여당이 승리한건 아니죠.
중산층을 자부하는 50%이상의 국민들이 더이상 데모대의 과격행동을 방치하면 스스로 설 자리를 잃는다는 위기감 때문에 일단 안정을 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죠.』
­중산층의 위기감 때문이란 말씀이군요.
『학생들과 재야의 시위·과격투쟁에 유권자들이 분명한 입장을 밝힌 것으로 봅니다.
이제 거리에서 화염병을 가지고 민주주의를 외쳐대는 것은 야당의 표만 떨어뜨리는 요인이 될거요.
그러나 이번에 안정을 좇아 여당에 표를 던졌던 중산층이나 기권자들이 다음 선거때도 같은 선택을 하리라고 보진 않아요.』
­이 선거가 앞으로의 정치엔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앞으론 총선이나 대통령선거에서 기성정치권이 내놓은 인물은 당선되기 어렵다고 봐야죠. 얼마 안남은 다음 선거까지 정당지도자들이 떨어진 명예를 회복하긴 어렵다고 봅니다.
민자당은 다수의석 획득으로 김영삼 대표의 지위가 공고해지지 않고 오히려 내부에서 상당한 시련을 겪을 것이오.』
­야당 통합전망은 어떻습니까.
『신민·민주당이 실패했기 때문에 단결된 외양은 보일 수는 있겠죠. 그러나 참된 단결이 안됩니다.
김대중 총재와 이기택 총재는 합쳐질 수 없어요. 이념때문에 갈라진게 아니고 대통령이 되고 싶어 자기당을 만든거 아닙니까.
합당을 해서 대통령후보가 안될 것 같으면 안하는거죠. 또 이유가 있어요.
당을 갖고 있어야 정치자금이 돌지요. 그들의 이념과 정강정책이 똑 같아도 당이 다른 것은 결국 보스들의 욕심 때문이죠.』(김교수는 「보스론」 비판을 하기 시작했다)
『김영삼씨는 왜 여당에 갔습니까. 대통령 되겠다고 간거죠. 오늘날 정치불신을 불러온 가장 큰 원인은 김씨와 노대통령의 합당 때문이었어요. 또다른 김씨는 말할 필요조차 안느낍니다.
노대통령을 「물대통령」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보면 안됩니다.
「물」이라도 되니까 이만한 민주화가 있는 거예요. 무질서·범죄 등엔 무능했지만 민주화엔 인정해줘야 합니다.
그런데 노대통령은 합당이라는 최대악수를 두었지요. 국민의 비난을 자청한 격입니다.』
­그렇다고 새사람이 나서면 성공할 수 있겠습니까. 선거는 점점 돈과 조직에 의해 좌우되는 경향인데요.
『돼요. 문제는 인물이 아니라 깃발입니다. 어떤 내용이 써있는 깃발을 들고 나가느냐는건데 깃발바람이 휘몰아 쳐 새로운 정치를 할 수 있어요.
무명의 뉴페이스 지미 카터는 「왜 최선을 다하지 않는가」(Why not the best)라는 깃발로 미국에서 성공하지 않았어요? 남성추종을 벗어나고 있는 여성표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 관계로 여러사람을 만나고 있는데 오늘은 이민우씨(구신한민주당 총재),이종남씨(전의원)를 만났더니 「기성정치는 끝났다」「그러나 새사람을 너무 일찍 내세우면 우리 풍토에서 거센 바람을 맞을 우려가 있다」고 하더군요.』
­도대체 깃발에는 어떤 내용이 들어갑니까.
『지금 쓰고있는 중이예요. 토지문제·세제개혁문제·돈안쓰고 정치하는 문제가 주요 내용이죠. 군사·병력관계 등 그밖에 평등의 가치를 지향하는 내용들입니다.(아마 그는 새정치세력의 정강정책·강령을 성안하고 있는 것 같다)
우선 토지매매를 없앤다는 것입니다. 인간불평등의 시작은 루소가 지적했듯이 욕심많은 자가 땅위에 금을 그어 「네것」「내것」을 가르는데 부터였어요. 토지만은 소유개념이 없어져야 해요.
땅만은 국가가 관리하고 그 위에서 자본주의가 발전해야 합니다. 기업가는 공장을 10개도 좋고 1백개도 좋고 마음껏 공장을 짓되 그 땅은 국가가 임대해줘 토지사용료를 받으면 돼요.
공산주의 아니냐고 깜짝 놀랄지 모르지만 제대로 기업을 운영하려는 기업가들도 내말에 동의합디다.
이 일은 통일을 앞두고 조국이 꼭 해야할 작업이고 토지를 부의 축적수단으로 삼는 사회속에서 좌절하는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주기위해서 반드시 실현돼야 합니다.
컴퓨터화가 완성돼 사회의 모든 돈의 흐름을 알아볼 수 있게 됐으니 금융실명제가 실시되는 것을 비롯한 세제개혁도 꼭 있어야 합니다.
회사를 꽤 많이 갖고 있는한 기업회장을 얼마전 만났는데 실명제 못하는게 정치권력의 「검은돈」의 필요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행정의 한 모퉁이를 돌때마다 돈을 반드시 집어줘야 한대요. 그래서 정치가 썩고 기업이 욕을 먹어요.』
­그거 사회주의 아닙니까.
『유럽에 민주사회주의도 있지요. 꽤 오래전 부터예요.
자유가 없던 시절엔 평등을 논하는게 무의미했으나 이제 자유의 가치가 상당히 실현됐으니 자유가치를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평등가치로나아가는 프로그레시브(진보적) 운동을 해야 합니다.
공산체제가 무너지는 마당에 혁신이라는 어휘는 그렇고 진보라고 하면 됩니다.
그래서 보수세력은 다 한곳으로 모이고 진보세력은 진보세력대로 「깃발」아래 뭉쳐 정치를 해야 합니다.』
­깃발의 기수는 누가 되지요. 김교수께서 직접 기수가 될 마음도 있나요.
『깃발바람이 기성정당의 보스들을 물리칠 수 있으려면 기수는 40∼50대의 세대교체 주자여야 합니다. 정치권인사여서는 안돼요.
전국의 깃발생각에 동감하는 사람들이 참여할거요. 구혁신운동하는 사람도 좋고 민중당도 좋고 시민연대회의도 좋아요.
내가 강연등을 통해 친하게 아는 사람만도 전국에 1백만명이 돼요.(웃음)
나는 기수를 위해 깃발을 만들어 내세울 뿐이오.』
­교수님께서 꾸짖는 학생운동권의 생각과 비슷하군요.
『학생들의 기상을 가로막아선 안돼요. 그러나 그들은 학생이라는 자기위치를 지켜야 합니다. 문제는 학생들의 시대착오적 발상과 과격한 행동방식에 있어요. 마르크시즘·레닌이즘·주체사상이 다 뭡니까. 고르바초프얘기도 좀 경청해요.
화염병으로 싸우지말고 선거에서 제뜻을 펼치란 말이오.』
­이른바 「낚시론」으로 3김퇴진을 주장하다 지난해엔 김대중 총재중심으로 야권통합이 돼야한다고 주장하셨던데요.
『그때나 지금이나 김씨들이 물러나주길 바랍니다. 그러나 강제로 물러나게는 할 수 없잖아요. 야권통합은 작년에 김영삼씨가 여당이 됐으니 야권통합의 현실논리상 힘있는 김총재 중심으로 해야 한다는거죠.
지역감정을 없앤다면서 또다른 지역당을 만든 민주당은 명분이 없어요.』
인사를 하고 자리를 뜨려는데 김교수가 불러 세웠다.
『어이,기자양반,젊은인들에게 J·S 밀의 「자유론」과 슘페터의 「자본주의·사회주의,그리고 민주주의」라는 책을 꼭 읽어보랬다고 써주게.』<인터뷰=김영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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