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 '동물 캐릭터 낳는' 여인의 열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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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아트릭스 포터라는 사람은 몰라도, '피터 래빗'이라는 동물 캐릭터는 아실 것이다. 이제는 고전이 된 여러 편의 동화를 통해 토끼.고양이.쥐 등 많은 동물 주인공을 창조한 작가다. 갖은 캐릭터 상품에 등장하는 삽화 역시 직접 그린 솜씨다. 영화 '미스 포터'(25일 개봉)는 바로 이 사람의 얘기다. 시대의 통념을 따르는 대신 자신만의 열정을 좇았던 한 여자의 삶이 그녀가 그린 수채화처럼 섬세하고 서정적인 연출로 재연된다.

여자에게 인생의 대세는 직업이 아니라 결혼이었던 1900년대 초, 베아트릭스(러네이 젤위거)는 서른을 넘긴 미혼이다. 어려서부터 이야기 만드는 재주가 있었던 그녀는 결혼할 남자를 정하는 대신 첫 책을 펴내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출판계에 첫발을 디딘 편집자 노먼(이완 맥그리거)은 진심으로 베아트릭스의 그림과 글에 반한다.

이들의 공동작업은 베스트셀러 행렬로 이어진다. 그래봤자 통념을 대변하는 베아트릭스의 어머니에게는 별 인정을 받지 못하지만. 어느새 사랑으로 발전한 둘의 관계 역시 부모의 반대에 부딪힌다. 반면 노먼의 여동생 밀리(에밀리 웟슨)는 베아트릭스와 마음이 통하는 친구가 돼 그들의 애정에도 아낌없는 격려를 보낸다.

이후 베아트릭스의 개인사는 숱한 곡절로 채워진다. 그 와중에도 늘 사랑해온 창작과 자연은 그의 힘겨운 일상을 지탱하는 힘이 된다. 베아트릭스는 이제 부모에게서 독립해 시골로 거처를 옮긴다. 주변의 농장이 하나 둘 도시개발업자들에게 팔려나갈 상황이 되자 베아트릭스는 그동안 벌어들인 인세 수입을 바탕으로 이에 맞선다. 토끼.오리.고슴도치 같은 친구를 자연에서 발견하고 사랑해온 사람다운 일이었다.

'미스 포터'는 거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여성주의.자연친화의 시각이 담겼으되 이를 큰 목소리로 웅변하지 않는다. 그 같은 시각은 한 여자가 자신의 행복을 찾아가는 방식 속에 자연스레 용해된다. 다만 그 방식은 세상의 시류와 가족의 기대를 거스르는 것도 감수할 만큼 적극적이어야 한다.

영화는 베아트릭스의 인생 가운데 굴곡이 심했던 한 시절에 집중한다. 시나리오 작업에만 8년이라는 산고를 겪었으면서도 생애 전체를 연대기로 펼쳐보이지 않는 현명함이 돋보인다. 감독은 '꼬마 돼지 베이브'를 데뷔작으로 내놓았던 크리스 누난이다.

베아트릭스는 수채화로 그림을 그리면서 그림 속의 동물과 대화를 나눈다. 그 동물들 역시 애니메이션 기법을 통해 장난스럽게 움직인다. '피터 래빗'을 만들어낸 작가의 삶을 다룬 영화로서는 안성맞춤이다. 그 효과가 극적으로 드러나는 대목은 베아트릭스가 비극적인 사건을 겪은 직후다. 격정과 비탄에 빠진 베아트릭스의 마음처럼, 그녀가 구겨버린 숱한 그림 속의 장면들이 애니메이션으로 움직인다. 그의 거칠고 황폐한 심경을 나타낸다.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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