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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나의 선택 나의 패션 39. 낭만의 도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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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패션 디자이너 가브리엘 샤넬. 나도 그녀처럼 유명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다.

조금씩 프랑스어가 들리기 시작했다. 아카데미 줄리안에서 패션 공부를 하는 한편 주말마다 아침에 두 시간씩 소르본느대 재학생인 아이린으로부터 프랑스어를 배웠다. 그녀는 나의 비서이기도 했다.

파리 오페라 하우스에서 오페라와 발레 공연을, 코메디 프란세즈에서는 갖가지 연극을 관람했다. 그리고 수많은 박물관과 화랑에 전시된 온갖 미술 작품을 보러 다니느라 하루가 짧기만 했다. 특히 루브르 박물관에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앞에서 한참 동안 감격하기도 했다.

나는 아카데미 줄리안의 원장님 소개로 종종 오트 쿠튀르(Haute Couture, 파리의 고급 맞춤복 패션쇼)를 볼 수 있었다. 발렌시아가 쇼에서는 싼값에 파는 샘플 옷을 사 입기도 했다. 최고급 맞춤복 가격으로는 아주 저렴한 500달러 정도에 샀는데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특이하고 멋진 옷이었다. 베이지색 플란넬 소재의 상의와 베이지색 바탕에 회색 줄무늬를 넣어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게 한 타이트 스커트가 잘 어울렸다. 여기에 나무 단추를 단 재킷은 풍성한 실루엣에 7부 소매였다. 재킷의 엉덩이 선이 타이트 스커트와 자연스럽게 만났다. 이 옷을 나중에 본 어머니가 '잠수함'이란 이름을 붙여주기도 했다.

크리스티앙 디오르 쇼에서는 내가 직접 옷을 입어보면서 옷의 전체적인 구조와 세밀한 부분을 샅샅이 살피며 연구했다. 마담 리치가 무슈 디오르와 함께 패션 디자이너로서 쌍벽을 이루던 그때, 니나 리치 쇼를 보러가서는 챙이 넓은 벨벳 모자를 주문하기도 했다.

여러 브랜드의 패션쇼를 돌아보면서 나는 고급 옷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심지 쓰는 법, 어깨 패드 다는 법, 스퀘어 네크라인을 들뜨지 않게 하는 노하우 등등. 쇼를 보고서는 즉시 택시를 타고 호텔로 돌아와 얼른 스케치를 그려 기록했다. 기억력이 유난히 나쁜 내가 옷의 디자인이라면 줄줄 외울 수 있는 게 늘 신기했다.

오늘날의 샹젤리제 거리는 1950년대 모습과는 너무나 다르다. 두세 집 건너 하나씩 자리 잡고 있던 멋진 부티크들 대신 갭.자라.베네통 등 세계적인 대형 브랜드들의 거대한 상점들이 거리를 차지하고 있다. 내가 알던 50년대 샹젤리제 거리는 '파리의 얼굴'이었다. 아기자기하고 작은 부티크들과 낭만적인 카페들이 있었고, 노천카페에 앉아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는 파리쟝과 파리지엔느들의 세련된 모습이 바로 샹젤리제의 고유한 풍경이었다.

특히 내가 좋아했던 곳은 '꼬리제'라는 카페였는데, 멋진 가로등이 늘어서 있는 그곳에서는 매일 오후 4시쯤 볼에 핑크색 연지를 동그랗게 칠하고 멋진 모자를 쓴 할머니들이 한가롭게 차를 마시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멋쟁이 젊은이들 외에도 '멋쟁이 노인'들까지 볼 수 있는 것은 패션의 도시 파리의 또 다른 매력이자 저력이었다.

노라 ·노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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