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종된 어의(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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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우리 국민에겐 사전적 의미는 분명하면서도 사회적인 통용가치가 상실돼버린 단어가 적어도 두개는 분명히 있다. 그 첫째가 「뿌리뽑는다」는 동사다.
강력범죄,폭력사범,퇴폐풍조,마약사범,공무원 비리 등 부정적인 사회문제가 부각될 때마다 정부나 사직당국이 내걸었던 슬로건은 그것들을 뿌리뽑겠다는 강력한 결의표시였다. 심지어 어떤 고위당국자는 불과 1개월 남짓되는 기간안에 전국의 강력사범을 일제히 뿌리뽑겠다고 대통령 앞에서 다짐한 적도 있다. 그와 동시에 무슨 타격대니,무슨 기동반이니 해서 요란한 발대식을 갖고 서슬이 시퍼렇게 전국을 이잡듯 누벼 정말 뿌리뽑을 듯 했지만 결과는 용두사미격이게 마련이었다. 그래서 이제는 뿌리뽑는다는 말을 믿고 기대를 갖는 국민은 아무도 없다.
이와 대동소이한 처지에 놓여있는 낱말이 「공명선거」다. 광복이후 수십번의 선거가 치러질 때마다 선거를 관리하는 정부나 선거에 참여하는 피선거인들의 입에서 한결같이 강조돼온 낱말이 바로 이 말이다. 그러나 반세기에 가까운 우리 선거사에서 빠짐없이 열창돼온 이 구호가 실현됐다는 기억을 우리 국민은 한차례도 갖고 있지 않다.
20일 실시된 광역의회 의원선거도 예외가 아니다. 공천과정에서의 금품거래로부터 시작해 선거운동기간의 금전살포·선심향응·관권개입·상호비방·중상모략·폭력 등 온갖 못된 버릇이 그대로 반복 답습됐다. 이에 한술 더 떠 유권자가 입후보자에게 당연한 권리인양 돈을 달라고 손을 벌리는 추태까지 드물지 않았다. 이번에도 선관위는 불법·위법사례를 철저히 색출해 고발하겠다는 결의표명을 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 국민에게는 공허하게만 들릴 뿐이다.
우리에겐 엄연히 관련선거법이 있다. 『국법을 받듦이 강하면 나라도 강하고,국법을 받듦이 약하면 나라도 약해지는 것이다.』 한비자의 말이다. 민주주의란 국민의 도덕적 양식과 법질서가 기본조건이 아닌가.
선거에서의 불법·위법관행은 그야말로 뿌리뽑혀야한다. 언제까지 이 국민적 타락과 국가적 수치를 방치할 것인가. 투표가 끝났다고 해서 흐지부지할 일이 아니다. 이번 선거전체를 무효화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 악폐의 고리를 끊겠다는 의지와 각오가 있어야한다. 윤관 선관위원장의 지적대로 규제가 지나쳐 지켜질 수 없는 법이라면 선거법 자체를 고치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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