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포기 선언 카다피 '리비아 개혁' 가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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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아 수도 트리폴리 시내의 한 호텔 부속 건물에 들어선 리비아 최초의 영어 간판.

거의 40년간 리비아를 통치해 오고 있는 무아마르 카다피가 개방 정책에 속도를 내고 있다. 마침내 영어 간판을 허용했다. 20일 수도 트리폴리 해안의 한 호텔 부속 건물엔 'Aman Bank'라는 간판이 선명했다.

공항에서 시내의 숙소까지 30여km를 달려왔지만 영어는 한 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랜드 호텔'이라고 들었던 숙소에도 영어 간판 대신 '알카비르( 크다는 뜻의 아랍어)'란 녹색 네온이 빌딩 위에서 빛나고 있었다. 미국 브랜드인 나이키 점포도 있지만 모두 아랍어로만 돼 있다. 이제 이런 간판들도 영어로 옷을 갈아입을 것으로 보인다. 2주 전 리비아 총인민회의가 '외국 상표 외국어 표기법'을 허가했기 때문이다.

아랍 사회주의와 반미를 외쳤던 카다피가 변신을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변신은 2003년 12월 핵개발 프로그램을 공식 포기하면서 시작됐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의 경제 제재에 두 손을 들었던 것이다. 두 달 뒤 미국은 20여 년간 취해온 리비아 여행금지 조치를 풀어주는 것으로 화답했다. 2005년 초 리비아 정부는 유전 탐사.채굴권을 국제입찰에 부쳤다. 외국인 직접투자의 문을 처음으로 연 것이다. 같은 해 10월 실시한 2차 채굴권 입찰에는 수십 개의 대형 석유회사가 응찰했다. 미국을 비롯한 유럽.일본.중국 석유회사 관계자들을 트리폴리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것도 그 덕분이다. 카다피는 앞으로 10년간 모두 300억 달러의 외자를 유치해 현재 하루 150만 배럴인 산유량을 300만 배럴로 늘린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트리폴리 서부 해안과 평행선을 긋고 있는 기르가르시 거리. 이 도시에서 가장 번화한 이곳은 오후 9시가 넘어도 사람과 차량 행렬로 넘쳐난다. 울긋불긋한 네온사인 사이로 어깨를 훤히 드러낸 여성 옷 점포들이 눈에 들어온다.

상호는 다르지만 피자헛이나 맥도널드를 모방한 패스트푸드점들도 즐비하다. 이런 곳은 청바지 차림의 젊은이들로 북적인다. 젊은 여성들은 아직 히잡(머리 두건)을 쓰고 다니지만 색깔은 분홍.노랑.파랑 등 화려하고 다양하다. 손을 잡고 다니는 데이트족들도 보인다. 자전거를 타는 수십 명의 청소년은 한밤에도 광장을 환하게 비추는 대형 조명시설 속에서 장기를 뽐낸다. 앞바퀴 들고 달리기, 뒤로 타기, 급정거와 경사 타기 등 X-스포츠에서 나오는 묘기들을 선보인다. "위성방송을 보고 배운 것"이라고 한 소년은 자랑했다.

아직도 비자 받기는 까다롭지만 외국인들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트리폴리에서 서쪽으로 60km 지점에 위치한 고대 페니키아.그리스.로마 유적지인 사브라타. 관광가이드는 "금발의 관광객들이 하루에도 10여 팀씩 방문한다"고 말했다.

트리폴리(리비아)=서정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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