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식 특파원이 본 「겉과 속」(9)-구동독 장교 1계급씩 강등|해체된 설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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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국군과 인민군 병사가 한 내무반에서 「장이야」「멍이야」하면서 장기를 두고 있다.』
통일이 어떤 것인지를 상상하는데 이처럼 우리 피부에 빨리 와 닿는 상황설정도 없을 것이다.
지금의 우리 국군과 북한인민군처럼 분단의 최전선에서 서로 총부리를 겨눈 채 대치해야 했던 구서독의 연방군과 구동독의 국가 인민군. 이 때문에 그 누구보다도 분단의 아픔을 절감할 수밖에 없었던 연방군장교와 국가인민군병사가 같은 막사에서 화기애애한 병영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바로 독일의 통일이다. 통일 후 구동독의 군대는 어떻게 변했을까.
국방부에 취재신청을 한지 한달쯤 지난 6월l0일 오전11시 취재허가를 받은 기자는 방문하기로 약속된 군부대소재지 라이프치히로 갔다.
라이프치히시 북쪽 골리스구피어텔스57번지에 위치한 군부대의 건물은 매우 낡았고 우중충했다.

<10월에 적성 재심>
정문초소엔 2명의 보초가 출입자와 승용차를 통제하고 있었으나 무기는 휴대하지 않고 있었다. 초소 옆엔 대형 독일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이곳은 통일전 에르프르트와 할레에 주둔하고 있던 2개의 기계학사단과 드레스덴의 전차사단을 지휘 통제하던 국가인민군 제3군관구 사령부였으나 통일과 함께 연방군 제7방위관구 사령부로 바뀌었습니다. 예하 부대인 3개의 전투사단도 연방군 제37(드레스덴), 38(할레), 39(에르푸르트)향토여단으로 이름과 기능이 축소 개편됐지요.』
정부초소까지 마중 나와 기자를 반갑게 맞이한 이 부대 대변인겸 연방군 월간지 『육군』의 편집장인 페터 E 우데 중령(52)은 이렇게 부대를 소개한 뒤 자신의 사무실로 안내했다.
본관6층 사무실에 도착한 우데 중령은 국가인민군 「접수」과정과 통일후의 변화 등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구서독 쾰른 근교의 군부대에 근무하던 그는 통일 2개월전인 지난해8월 20명의 「국가인민군접수요원」소속으로 당시 구동독 국방부가 있던 베를린 근교의 슈트라우스베르크로 왔다. 팀장은 현재 이 부대 사령관인 에케하르트리히터 소장(당시는 준장)으로 이들의 임무는 국가인민군의 연방군 편입을 준비하기 위한 것.
이 과정에서 국가인민군의 모든 장성과 대부분의 고위장교가 전역 당했다.
『10월3일 구동독 국방부건물에 통일독일기(구서독기)가 게양되면서 구동독의 국가인민군은 연방군동부사령부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연방군에 전격 편입됐습니다. 군 최고통수권자도 에펠만 구동독 국방장관에서 슈톨텐베르크 구서독 국방장관으로 바뀌었으며 사령관으로 쇤봄 중장이 취임했습니다.』
통일과 함께 연방군에 편입된 국가인민군 병력은 9만8천명. 89년 「만5천명이던 병력 중 장벽붕괴이후 대거 탈영했고 고위간부들은 예편 당했기 때문에 편입병력은 원래의 절반정도로 줄었다. 이 가운데 장교는 2만7천명이고 나머지는 직업하사관 1만1천5백명, 징집범 2만5천명, 장기하사관 1만명, 여군 1천명이었다.
이 가운데 장교들은 ▲능력이 있는가 ▲인성과 적성을 갖췄나 ▲슈타지 등 정치군인은 아닌가 등 엄격한 심사를 거쳐 편입이 결정됐고 나머지는 자의·타의로 군을 떠났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연방군에 편입된 장교들도 1, 2계급씩 강등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이는 구동독군의 진급이 구서독군에 비해 빨랐기 때문에 이를 조정하기 위한 것. 이들은 또 우선은 2년밖에 근무할 수 없는 조건으로 편입됐다. 그러나 이들 중 오는 10월의 재심사를 통과하는 사람은 정식 직업군인으로 정년 때까지 근무가 보장된다는 것이다.

<탱크·야포는 고철>
그는 이어 국가인민군으로부터 인수받은 장비에 대해 설명했다.
인수무기 가운데 중요한 품목만도 T72탱크 5백49대 등 탱크 2천2백29대, 미그29기 24대 등 전투기 3백22대, 각종 장갑차 3천9백57대, 1백22㎜ 야포와 자주포 7백69문, 다연장로킷 2백65대 등이 있고 16만 정도의 자동소총과 30만t의 탄약도 그대로 연방군에 넘어왔다.
『이들 장비 중 개인화기와 수송차량 등은 그대로 사용하고 있지만 탱크·야포 등 중장비는 대부분 저장소를 새로 만들어 「고철」로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살상용 무기가 아닌 것은 외국에 원조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대형수송차량을 걸프전 때 다국적군에 지원했고 쿠르드 난민들에게는 텐트·의료품·의복 등이 지원됐습니다.』
이들 무기 중 특히 소련제 최신형전투기인 미그29기는 소련과의 합의에 의해 실전에 배치하지 않기로 했다는 것이다.
구동독군 무기 가운데 혹시 북한에서 사간 것은 없느냐고 묻자 그는 『적어도 제7방위관 구사령부에서는 총 한 자루도 없다』고 말하면서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했다. 그의 안내로 이 부대의 이곳저곳을 둘러봤다.
3층의 한 내무반에 들어가자 피셔 이병(23)과 프렌첼 이병(21)이 서양장기를 두다 일행을 맞았다.
통일 한달전인 지난해 9월 국가인민군에 입대한 프렌첼 이병은 『연방군 군복을 입고연방군에 근무한다는 사실이 자랑스럽다』고 씩씩하게 말하고 오는9월 제대 후 대학에 진학할 생각이라고 했다. 그와 같은 날 입대한 피셔 이병은 『국가인민군을 채 알기도 전에 연방군에 편입돼 비교할 수는 없지만 분위기가 좋은 것 같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히죽히죽 웃으며 중대장과 중령을 대하는 이들의 태도는 상당히 군기가 빠져있었다.
우데 중령의 사무실로 다시 돌아오면서 둘러본 수송중대의 차량들은 매우 낡아 어떤 차는 페인트가 벗겨지고 차체가 썩어있었다.
우데 중령의 사무실에서 이 부대에 몇 안남은 구동독군 출신 장교증 한사람인 토마스슈트로벨 소령(44)을 만났다.
지난66년 소위로 군 생활을 시작한 그는 원래 국가인민군중령으로 이 부대에 근무했으나 연방군 편입 후 소령으로 강등됐다. 월급은 2천3백 마르크. 이는 같은 계급의 서독군인 월급의 60%수준이지만 만족한다고 했다.

<가장 빠르게 화합>
그러나 얼마 전 구동독군 출신 장교의 월급이 서쪽보다 적어 사기가 저하되고 있다는 연방하원군사위원회의 보고를 신문에서 읽은 기억이 언뜻 스치면서 그의 말은 우데 중령을 의식한 발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해 11월 함부르크에 있는 군사학교에서 3주간 정신교육을 받았습니다. 내용은 군인의 자세와 법률 및 국민의 권리 등이었는데 매우 유익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통일 후 나아진 것은 자기의사를 솔직히 표현할 수 있게된 것과 여행을 자유롭게 할 수 있게된 것이라며 이번 여름휴가는 바이에른주의 알프스산지로 갈 예정이라고 했다.
그는 또 오는10월께에 있을 정식 직업군인채용심사에 합격되길 바라지만 가능성은 5대 5라고 말했다.
4시간여 이 부대를 둘러보는 동안 건물시설이 낡았고 구동독군 장비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 이외에는 어디서도 국가인민군의 자취를 찾을 수 없었다. 가장 첨예한 대립의 주역이었던 군의통일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가장 빨리 완성되고 있었다.
오후3시 우데 중령의 배웅을 받으며 군부대를 나선 기자의 마음은 화창한 날씨인데도 무겁기만 했다.
과연 국군장교와 인민군병사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장기를 두는 날은 언제일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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