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속' 발목잡은 정치권·민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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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14일 경부고속철도 중간역 세 곳을 신설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사업 착공 13년 만에 전체 노선이 최종 확정됐다.

그러나 잦은 설계 변경으로 예산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적자의 수렁에서 헤어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특히 이번 결정을 두고 정치권과 민원에 밀려 대형 국책사업인 고속철이 저속철로 전락할 위기에 처했다는 비판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중간역이 아홉 곳으로 늘어 열차가 '가다 서다'를 반복할 수밖에 없고 중간역 한 곳당 7분가량 운행시간이 추가되기 때문이다. 또 중간역마다 1천2백억원의 건설비가 소요돼 18조4천억여원까지 불어난 사업비의 추가 투자도 불가피할 전망이다.

고속철 건설사업과 관련해 그동안 정치권과 지자체의 민원이 끊이지 않았다. 단적인 예로 2단계 공사 중인 대구의 경우 건설교통부는 도심을 지하로 통과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지만 해당 지역 국회의원이 반지상화를 주장하면서 공사가 표류하고 있다.

건교부는 이날 중간역 신설 결정을 발표하면서 보도자료를 통해 이번 결정은 내년 총선용으로 급조된 것이 아니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를 곧이 곧대로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번 결정도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이 지난 9월 울산을 방문해 "인구 1백만명이 넘는 도시에 중간역을 설치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한 후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그 전만 해도 논의만 무성했을 뿐 변다른 진전이 없었다.

전체 구간이 4백12㎞인 노선에 중간역이 아홉 곳이나 들어서는 것은 고속철의 경제성과 거리가 멀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이번에 새로 중간역으로 선정된 오송역의 경우 천안.아산역과의 거리가 28.6㎞에 불과하다. 모든 역간 평균 거리는 45㎞ 정도다.

이와 관련, 국토연구원 조남건 연구위원은 "선진 외국의 고속철 운행 경험상 열차의 기술적인 서비스를 지원해 주기 위해 중간역은 80㎞마다 설치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밝혔다. 고속철의 선진국으로 꼽히는 프랑스의 역간 평균 거리도 1백10㎞ 정도다.

중간역을 많이 설치하면 그만큼 운행시간이 늘어나게 마련이다. 고속열차는 정차한 뒤 다시 가속하는 데 22㎞(6분30초)의 거리가 있어야 하고 정상 정차를 위해서는 6.6㎞의 거리가 필요해 정차역 한 곳을 늘리면 7분 정도의 시간 손실이 불가피하다.

따라서 모든 열차가 정차할 것으로 보이는 대전.대구와 중간역 한두 곳에 정차하더라도 서울~부산 간 운행시간은 2시간20분대로 늘어난다.

더구나 고속철 채무가 2004년 4월 기준으로 8조원이 넘고 2008년 2단계 사업 완공 시점에는 12조원 이상으로 불어나기 때문에 돈을 더 벌기 위해서는 중간역 정차를 늘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또 건교부가 1천2백억원으로 산정한 중간역 한 곳당 건설비용도 더욱 불어날 수밖에 없다. 1천2백억원에는 역까지의 접근도로나 역사 주변 주차장 등의 편의시설 건설 비용이 포함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장정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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