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포럼] 개발연대 세대의 마지막 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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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개발연대는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30여년간의 기간이다. 50.60.70대가 주축이 된 개발연대의 역군들은 정말 좌고우면하지 않고 열심히 앞을 향해 전진해 왔다. 가진 것이 너무 없었기 때문에 먹고사는 문제의 해결에 가장 우선순위를 두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주력세대가 흘린 땀과 피의 대가가 오늘의 대한민국인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나라를 되찾거나 독립했던 1백여개 국가 중 선진국 수준의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를 동시에 성취한 나라는 우리밖에 없다.

그들은 그것을 가능케 한 물적 토대를 차곡차곡 쌓았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때로는 권력과 금력 앞에 타협.굴종하기도 하고 맞서기도 했다. 그렇기에 때묻은 세대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기아(飢餓)로부터의 해방, 그 결과로 조성된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구현이라는 그 연대의 꿈은 이루어냈다.

그런 위대한 성취를 한 개발연대의 주력들은 이제 연령적 이유로 물러났거나 1997년 IMF사태의 직격탄을 맞고 퇴직을 강요당했다. 그 연대의 막내세대인 50대는 인생의 가장 황금기에 꽃도 한번 제대로 피워보지 못한 채 대부분 직장에서 밀려나는 비애를 맛봐야 했다.

어둠이 있으면 빛이 있듯 산업역군들과 달리 정치투쟁에 몸을 던졌던 소수의 동년배들은 국가로부터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으면서 일부는 금전보상까지 받고 있다. 투쟁가들 중 일부는 지난 20여년간 정치세력의 영입을 받고 정계와 관계로 투신했다. 자발적인 정계 진출자들도 드물지 않았다.

투쟁가들은 김대중 정부에 이어 노무현 정부에 이르러선 중추적 세력으로 성장했다. 이런 현실에 개발연대의 말없는 다수는 불편한 심정을 느끼는 듯하다. 시기와 질투에서가 아니다. '민주화를 성취하는 데 밑거름이 됐던 우리는 무엇인가'라는 정체성의 혼란 때문이리라.

그런 그들을 정말 더 울울하게 만드는 사태는 질풍노도의 시대를 같이 살았던 또 다른 부류의 끝없는 부패행태다. 군부 독재체제에 기생했거나 민주화 투쟁에 나섰던 인사들을 불문하고 권력을 잡기 위해, 금력을 더 키우기 위해 야합한 정경유착의 악취가 연일 드러나기 때문이다. '민주화운동 관련자'도 아니면서 '부패세대'의 오명을 덤터기 써야 할 야릇한 팔자에 분노하고 억울한 것이다.

손길승 SK그룹 회장은 지난 대선에서 최돈웅.이상수 의원을 통해 여야에 수백억원의 돈을 뿌렸다. 쌍방의 거래바탕은 권력이다. 권력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개발연대의 패러다임이 혁파돼야 한다는 시대정신이 똬리를 트는 시점에 근대화 세대도 민주화 세력도 조폭류(類)의 칙칙한 거래를 자행했다.

그래 놓고 이제 와서 더 받고 덜 받은 것, 자발적이냐 비자발적이냐를 따지는 치사한 공방을 벌이고 있다. 그것이 무슨 대수인가. 패자인 '대쪽'도, 승자인 '인권변호사'도 비리 혐의에 함몰된 개발연대의 사생아들이라는 데는 본질적 차이가 있을 수 없다.

왜 이런 기막힌 현상이 일어났는가. 개발연대 세력들이 민주와 반민주의 구분을 떠나 권력쟁취에 나선 정상배들이 이 나라를 너무 오래 재단하도록 방임하고 때로 조장했기 때문이다. 개발연대의 주력들은 과거를 자성해야 한다. 그리고 부패로부터의 해방을 마지막 과업으로 삼아야 한다. 부패 없는 사회를 만듦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를 완결하는 것이다.

개발 주력 세력이 주눅도 들지 말고 섭섭함도 삼키면서 후대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해 부패의 사슬을 끊는 시민운동에 앞장서야 한다. 수백만의 조용한 노.장층이 힘을 결집한다면 당대에 그 마지막 꿈도 실현하지 못할 리가 없을 것이다. 그 꿈을 접고 간다면 너무 억울하지 않겠는가.

이수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