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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육-직장 힘겨운 1인2역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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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기혼 여성 근로자들이 직장생활을 하면서 겪는 가장 큰 애로사항은 무엇일까. 그것은 육체적 고통도, 불평등한 처우도 아니고 일 나간 사이 자녀를 안심하고 맡길만한 곳이 없다는 사실이다.
실제 많은 기혼 여성근로자들이 일하고 싶어하고 일할 능력이었음에도 불구, 자녀보육문제라는 벽에 부닥쳐 일손을 놓고있으며 일을 계속해야할 경우에는 방치된 자녀에 대한 걱정으로 1백% 능력발휘를 못하고있다.
핵가족화에 따른 이 같은 현상은 현재 극심한 인력난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여성인력의 활용이라는 측면은 물론 모성 및 아동보호라는 측면에서도 결코 가볍게 여겨질 성질의 것이 아니다.
정부는 이에 따라 취학 전 아동을 위한 국·공립 보육시설(탁아소)을 더욱 확충하고 직장에 자체 보육시설을 설치토록 권장하는 등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의 대책은 예산상 한계가 있고 사업주들의 적극 협조가 없을 경우 만족할만한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각 노조가 단체협상 등을 통해 자구책을 찾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라는 지적이 많다.
◇실태=서울광화문에 있는 한 금융기관에 근무하는 최모씨(30·서울 개포동 주공아파트2단지)는 탁아문제로 직장생활에 큰 지장을 받고있는 수많은 여성근로자 가운데 한사람이다.
시집과 친정쪽 부모가 모두 일찍 돌아가고 형제들도 모두 지방 또는 외국에 거주하고 있는 최씨는 집 근처에 마땅한 보육시설이 없고 직장에도 보육시설이 없어 두 살 난 딸을 파출부에게 맡겨두고 있다.
최씨는 파출부 근무시간(오전 8시∼오후 6시)에 맞춰 퇴근해야 하기 때문에 직장 일이 늦어지면 짜증부터 내게되고 파출부가 예고 없이 그만두거나 몸이 아파 쉴 경우 결근하게 되니 직장 일에 충실할래야 충실할 수가 없다.
더구나 파출부에게 지급하고 있는 월30만원은 자신의 월수입의 반을 넘는 금액으로 수입의 대부분이 저축으로 연결되지 않는 바람에 재작년 집 장만시 빌렸던 융자금 3천만원을 언제 갚을지 아득하다. 최씨는 아무래도 둘째가 생기면 직장은 그만둘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체념하고있다.
이 같은 고민은 최씨만의 것이 아니다.
한국노총이 지난달 말 서울·부산·경기지역 34개 사업장의 생산·사무·판매직 기혼 여성근로자 5백48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탁아실태 조사결과에 따르면 75·7%가 직장생활의 최대 애로사항으로 자녀양육문제를 들었고 이중 절반이상이 아이를 안심하고 맡길만한 곳이 없어 고민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17·8%가 자녀를 멀리 있는 친척집 등에 맡기고 따로 떨어져 살고 있었으며, 6·1%가 마땅한 보육시설이 없거나 보육비가 부담이 되어 아이를 그냥 집에 방치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보육시설을 이용하고 있는 경우에도 보육비 지출이 월 ▲15만원이상 36·2% ▲15만∼10만원 18·2% ▲10만∼6만원 31%로 월 평균소득의 3분의1을 넘을 만큼 경제적 부담이 큰 것으로 조사됐다.
지난해 가을 한국행동과학연구소가 대도시 중산층·저소득층과 농어촌의 4천2백27가구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도 기혼 취업여성의 92·6%가 보육시설이 꼭 필요하다고 응답했으며 비취업 여성의 작·2%가 보육시설을 이용할 수 있다면 직장을 갖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처럼 많은 기혼 여성근로자들이 보육시설에 목말라하고 있으나 현재의 보육시설은 턱없이 부족하다.
보사부에 따르면 90년말 현재 보육시설은 전국에 국·공립 6백60개소(5만여명 수용), 일반 1천9백개소(2만3천여명 수용)에 불과하다.
어머니가 취업하고 마땅히 돌봐줄 사람이 없는 0∼5세 보육대상 아동이 1백8만여명으로 추계되고 있으므로 공급이 수요의 7%선에 그치고 있는 셈이다.
더구나 보육시설 대부분이 오후 6∼7시면 문을 닫아 2∼3교대 근무 여성근로자들에겐 「그림의 떡」이며, 일반보육시설(월12만∼15만원)보다 싼 국·공립보육시설(월3만∼4만원)의 경우 생활보호대상자·저소득층 자녀를 우선적으로 받기 때문에 문턱은 매우 높다.
직장 보육시설은 여성 근로자들의 심리적 안정효과 등으로, 크게 선호되고 있으나 아직 보편화되지 않아 서울의 협진양행·부산의 동일화성·안양의 삼풍 캠브리지 등 20여개 업체에서 설치해 놓고 있을 뿐이다.
최근 공단주변 등 제조업체에 있어서는 직장보육시설 설치가 주부인력 활용방안의 하나로 적극 검토되는 추세이나 사무·전문직종의 경우에는 여성근로자들이 밀집해있지 않은 등 이유 때문에 아직 요원한 형편이다.
◇정부대책=정부가 탁아문제를 국민복지차원에서 추진키로 함에 따라 보사부는 노동부 등 관련부처의 업무까지 넘겨받아 지난1월 공포된 영·유아보육법의 구체적인 시행력 및 시행규칙을 이달 중 만들어 시행할 계획이다.
주요 골자는 ▲상시 여성근로자 5백명 이상 사업장에 대해서는 직장 보육시설 설치를 의무화하고 ▲중소기업이 직장보육시설을 만들 경우 정부가 적극 지원토록 하며▲이들 업체에 대해서는 설치 및 운영비용에 대해 세금감면혜택을 주도록 한다는 것 등이다.
이와 함께 ▲5백가구 이상 주택 건설시에는 보육시설을 의무적으로 설치토록 하고▲일반 보육시설의 설립인가 기준을 완화하는 것 등도 포함되어있다.
보사부는 이밖에 국·공립보육시설을 95년까지 2천10개소 더 만들어 수혜 폭을 넓힐 계획이다.
◇문제점=정부의 이 같은 대책은 큰 실효성을 기대하기 어려운 「생색용」일 뿐이라는 지적이 많다.
우선 보육시설 설치를 의무화한 여성근로자 5백명 이상 사업장은 전국적으로 6백여곳에 불과하며 그나마 취업여성의 대부분이 미혼이라는 점이다. 게다가 보육시설을 설치하지 않을 경우 구체적인 벌칙조항이 명시되어있지 않다는 것이다.
또 자녀양육 책임은 부부가 함께 지는 것인데 굳이 여성근로자 사업장만을 의무설치 대상으로 하는 것도 잘못된 생각이라는 지적이다.
이와 함께 보육시설 설치에 대해 세금감면혜택·정부지원확대 등의 방침은 관계 부처에서 난색을 표하고 있어 계획대로 이뤄질지 아직 미지수다.
이와 관련, 노총의 김영자 여성국장은 ▲보육시설 의무설치업체를 1백50명 이상 사업장까지 확대하고 ▲기업에 대한 보조 및 세금감면조치는 조세감면규제법·소득세법 등에 구체적으로 명시해 시행하며 ▲국·공립 보육시설을 더 확대하되 장시간 근무, 2∼3교대 근무하는 사람들을 위해 종일제로 운영하는 곳을 늘리고 ▲현실적으로 비용이 많이 드는 일반 보육시설 이용자가 많음을 감안, 탁아비용을 소득세에서 공제해 줄 것 등을 제안했다.
노동계·여성계의 많은 관계자들은 『직장 보육시설 설치에 관한 한 노조가 단체협상 등을 통해 사용자로부터 얻어내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말하고 『남성 근로자와 미혼여성 근로자들이 이 문제를 남의 일로 여기지 말고 기혼여성 근로자들에게 힘을 보태줘야 협상의 주요 이슈가 되어 성사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라고 충고하고 있다. <김동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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