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책갈피] '여권 신장'을 위한 100년의 투쟁기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3면

저속과 과속의 부조화, 페미니즘

사빈 보리오-발리시 외 지음, 유재명 옮김

부키, 265쪽, 1만7500원

2차 대전이 터지자 세계 각국은 전쟁터에 나간 남자들 대신 공장을 돌리기 위해 여성을 동원할 필요성을 느꼈다.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참전한 미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성 리벳공 로지' '여성 용접공 웨니' 같은 인물들이 급조돼 영웅으로 불렸다. 41년에 1100만 명이던 일 하는 여성 수는 44년에 1800만 명으로 늘어났다.

2차 대전이 끝난 뒤 미국 정부는 또 한번 선전전을 벌였다. 이번엔 여성을 노동시장에서 몰아내기 위함이었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군인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해야 했기 때문이다. 근로 여성들 대부분은 일자리를 유지하길 원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여성들이 있어야 할 곳은 가정이라고 설득했다.

라디오.잡지.영화 그리고 곧 이어 텔레비전까지 가세해 전기 다리미, 가스 레인지, 세탁기, 냉장고 등 새로운 가전제품에 둘러싸여 왕비처럼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장밋빛 청사진을 떠벌렸다. 46년 이후 400만 명의 여성들, 특히 높은 임금을 받는 일을 하던 여성들이 일자리를 떠났다. 그렇다면 가정주부가 된 여성들의 삶은 보다 편안해졌을까. 불행하게도 그렇지 못했다. 전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이 요구되는 가정 관리 모델을 강요받았을 뿐이었다. 가전제품의 보급 결과 이제 가정은 완벽해야 했다. 반짝반짝 윤이 나고 정돈이 잘 되어있어야 했다. 한순간이라도 일을 하지 않으면 죄의식을 갖게 할 정도로 가사 노동 시간은 끝도 없이 늘어난 것이다.

이처럼 여성은 역사적으로 남성들의 필요에 따라 운명지어졌다. 이 책은 그야말로 딸로, 아내로, 어머니로만 존재하던 '보이지 않는 인간'이었던 여성이 어떻게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됐는지를 살펴보는 '여권 신장'을 위한 페미니즘 100년의 투쟁기다.

서유럽에서 페미니즘은 상당한 성과를 거둔 듯했다. 독립적 재산권 행사, 투표권 부여, 이혼과 낙태의 자유 획득 등이 나라마다 시차는 있지만 이뤄졌다. 하지만 그것은 더 복잡한 숙제를 남겼다. 21세기의 목전에 프랑스에서 일어난 차도르 사건이 좋은 예다. 차도르 착용을 고집한 무슬림 여학생들이 퇴학당한 것이다. 페미니스트들은 차도르 착용은 여성에 대한 억압의 표현이라며 학교 측을 지지했다. 여학생들이 학교에서 추방됐다는 사실은 무시되고 말았다. 페미니즘이 여성들 사이에서, 각 나라들 사이에서, 특히 저개발국과 선진국들 사이에서 저속과 과속의 부조화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책은 페미니즘의 역사와 함께 여성사에 한 획을 그은 중요 인물들과 여성 문제에서 여전히 논쟁이 되고 있는 주요 쟁점들을 소개한다. 그 과정에서 여성들이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훈범 논설위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