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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가 억울하지 않게/의료분쟁 중재는 공신력이 생명(사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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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보건사회부가 마련한 의료피해구제법(시안)은 해마다 늘어나는 의료분쟁을 합리적이고 신속하게 해결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라는 점에서 우선 기대를 갖게한다.
지난 83년에 불과 40여건이던 환자와 진료의사 사이의 분쟁이 지난 89년엔 6백여건으로 크게 증가했다. 이것도 소비자단체나 대한의학협회에 환자측에서 피해보상 민원을 제출한 건수이고 공식화되지 않은 분쟁까지를 포함하면 2천여건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보사부가 마련한 의료사고 피해구제 법안은 의료분쟁 해결을 위해 행정심판제도를 도입,분쟁내용을 조사·심의해서 당사자들까리의 합의를 유도하는 중재위원회를 설치하도록 했다. 중재위에서 합의에 실패할 경우 배상액과 의료인에 대한 제재여부를 결정하는 심판위원회를 두게돼있다. 피해배상을 위해 구제기금도 설치하는 한편,이런 절차를 무시한 피해자의 난동이나 협박에 대해서는 피해구제 대상에서 제외하는 동시에 형사처벌을 가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현재도 피해구제제도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대한의학협회가 지난 82년부터 웅영해온 의료사고 공제회가 있어 개업의사들의 임의 가입에 따라 회비를 받아 피해배상을 해왔다. 그러나 배상한도액이 미미한 액수로 제한돼 있는데다가 피해심사와 결정이 같은 의료인들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의료인과 환자들로부터 모두 공신력을 의심받아 제구실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불복하여 법에 호소할 경우 소송비용이 큰 부담이 될뿐만 아니라 재판기간이 짧아도 1∼2년,길면 10여년씩 걸리기 때문에 중도에 소송을 포기하고 피해자가 불리한 입장에서 합의해온 것이 현실이다.
끝까지 소송을 한다해도 법관 스스로가 전문적인 의학지식에 미칠 수 없어 결국 의사의 자문을 받게되므로 「가재는 게편」식의 봐주기 증언이 된다는 의혹을 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새로 구성되는 중재위와 심판위 역시 객관적인 중립성과 공신력이 이 제도 성패의 열쇠가 된다. 보사부시안에 따르면 중재위는 전문의료인과 법조인,심판위는 법조인과 의료인·관련학자·사회공익단체 대표 등으로 구성된다. 심판위의 위원장은 전직 대법관 중에서 선임해 대통령이 임명하게 돼있다. 위원회의 중립성과 객관성 유지를 위한 당국의 배려에 고심한 흔적이 역력하다.
문제는 의료행위라는 것이 고도의 전문성을 갖는 특성때문에 중재위와 심판위 구성원중 의료인의 판단비중이 가위 절대적이라는 점이다. 의료인의 판정이 잘못됐을 경우 이를 가려낼 수 있는 전문성을 아무도 갖지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의료피해 구제제도의 취지와 목적이 억울한 피해를 본 환자측뿐만 아니라 올바른 의료행위에 대한 국민의 신뢰와 안심하고 환자를 소신껏 진료할 수 있는 의료인의 권한을 아울러 보호하기 위한 제도라는 것을 다시한번 강조할 필요가있다. 그런 신뢰의 확보를 위해서는 중립적인 입장에 설 수 있는 의료인이 구성원으로 참가해야할 것이다. 또 그들이 국민의 신뢰를 받도록 실적을 쌓아가는 수밖에 없다.
전국민에게 의료보험이 실시됨에 따라 의료사고의 가능성도 그만큼 높아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추세일 것이다. 이에 따르는 위험부담 때문에 의료인들이 진료를 기피하거나 위험이 적은 과목으로 전공을 선호하는 최근의 경향은 우리의 의료발전을 위해 극히 우려할 일이 아닐 수 없다. 환자의 입장에서도 의료사고가 났을때 감정적인 대응이 아닌 합리적 원인규명과 배상을 제도적으로 보장받는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의료사고는 의사와 환자 사이의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다. 의학기술의 발달로 진단과 진료가 더욱 복잡해져 개인적으로 책임질 수 없는 영역이 넓어지고 있다. 국가가 주도하는 의료분쟁 조정기구와 피해구제기금의 설치는 더욱 절시해지고 있다.
이러한 조정과 중재의 제도적 장치는 사회구조가 복잡해지고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되는 고도산업 사회에서는 비단 의료분쟁뿐만 아니라 어느분야에나 필요한 것이다. 정부와 각 이해관련 집단들이 귀감으로 삼을 수 있을만큼 이번 의료피해구제법안이 좋은 모델을 제시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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