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공 인종차별법 폐지/흑백분리정책 월내 소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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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전국토 87%에 대한 백인특권 박탈
【케이프타운 AFP·AP·로이터=연합】 남아프리카공화국 의회는 5일 아직 남아있는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정책 근간법 3개중 2개를 폐기하고 또하나를 폐기하기 위한 법안을 제출했다.
폐기된 법은 남아프리카국토의 87%를 백인이 소유하게 하는 1913년 및 1936년의 토지법과 인종에 따라 주거지역을 구분한 1950년의 집단거주지역법이다.
새로 제출된 법안은 최종 근간법인 인종을 근거로한 토지조치법을 폐기하기 위한 것으로,이 법이 통과되면 오는 30일부터 남아공의 법령집에서 아파르트헤이트가 사라지게되는데 새 법의 통과는 이미 보장돼 있다.
이로써 국토의 87%에 대한 백인의 특권이 사라지고 백인전용 주거지역이 모든 인종에게 개방되지만 이번 조치가 흑인으로부터 빼앗은 토지를 돌려주고 차별대우의 피해자들에게 보상하라는 넬슨 만델라가 이끄는 아프리카 민족회의(ANC)의 요구에는 미달하고 있다.
인종분리정책에 반대하고 있는 진보계 백인정당인 민주당의 피터 소올 의원은 이번 조치를 환영하면서 이로써 지난 40년동안 강제로 고향에서 쫓겨난 3백50만명으로 추산되는 흑인들에게 토지를 돌려주는 길이 열리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토지조치법을 폐기하기 위한 새 법은 현재 백인전용지역으로 돼 있는 구주지구에 환경보존과 인구밀도에 관한 기준을 마련해 시행하도록 규정한 조항이 들어있어 말썽의 소지를 안고 있다.
한편 극우파들은 백인의 토지를 수호하기 위해 무기를 들고 일어서겠다고 다짐하고 있으며 백인들의 농지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흑인들을 공격하겠다고 위협하고 있다.
◎흑인끼리도 불화… 정국혼란 우려/ANC협상주도에 줄루족 반발(해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회는 5일 흑백인의 주거지역을 분리시켜온 집단거주지역법과 대부분의 토지를 백인에게 점령시켜온 토지법을 폐지하는 법안을 제출함으로써 인종분리정책 종식에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그러나 흑인집단간의 잇단 유혈충돌에다 가장 유력한 대통령후보 만델라의 부인이 실형선고까지 받는등 남아공의 정국은 미궁을 아직 벗어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이후시대 권력향방을 놓고 흑인끼리의 적대감과 공포가 이 나라를 휩쓸고 있을뿐 아니라 정부의 조치에 대한 불신이 민주화진전을 어렵게 하고 있다.
3천만명에 이르는 흑인들의 토지소유를 불법화해온 토지법,흑인의 주거지역을 제한해온 집단거주지역법의 폐기에도 불구하고 전국토의 87%를 5백만명의 백인이 독차지해온 것을 시정할 정부의 의지와 토지를 구입할 흑인의 재력도 뒷받침되지 않고 있다.
지난해 흑인단체의 합법화 이후 흑인들의 주거지역은 사실상 제한이 어려운 형편이어서 이번 백인정권의 조치 하나로 사회적인 변화가 금방 실현되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는 실정이다.
이 나라 최대 흑인단체인 아프리카민족회의(ANC)는 전국민의 투표권을 보장한 총선을 통해 집권한뒤 토지개혁을 실시,40여년간 흑인들이 본 피해를 일시에 보상받으려 하고 있다. 이에반해 남부 나탈지역을 중심으로한 또다른 흑인단체 줄루족의 인카타자유당은 백인정권과 일정부분 협력,연방형태의 나탈지역 자치를 주장하며 ANC의 개혁주도권을 폭력으로 잠식해왔다. 이들 두세력간의 폭력충돌로 올해만 1천여명의 흑인들이 희생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난해 2월 흑인들의 희망을 한몸에 받으며 28년간의 옥고에서 풀려난 넬슨 만델라 ANC부의장은 올 4월까지도 프레데릭 드 클레르크 대통령과의 신헌법협상을 비교적 온건하게 끌어왔다.
그러나 흑인집단간의 폭력사태로 ANC 지지파가 급격히 위축되는데다 정부가 폭력을 조장 내지 방관한다는 혐의가 짙어지자 지난달 17일 정부의 납득할만한 폭력중단 조치가 있을때까지 협상중단을 선언했다.
그의 출옥당시까지 3만여명의 지지자로 미미한 지방부족에 지나지 않던 인카타자유당은 지난해 8월이후 지금까지 폭력을 동원,2백만당원의 거대세력으로 정치적 발언권을 강화했다.
드 클레르크대통령은 만델라와의 협상에서 수세에 몰리자 ANC의 협상중단위협에도 불구,지난달 10일 소요지역에서의 무기소지금지령을 내리면서 인카타자유당측의 요구를 수용,창·곤봉등 줄루족의 전통무기만은 예외로 하는등 ANC의 반발을 폭발시켰다.
만델라는 게다가 남아공개혁의 압력수단이었던 해외각국의 금수조치의 잇단 철회,협상중단을 요구하는 ANC내 과격파의 득세로 협상폭이 점점 줄어들었다.
게다가 부인 위니 만델라(56)가 흑인소년 납치 및 폭행방조혐의로 6년형을 선고받아 73세 노구의 만델라가 설 자리는 더욱 좁아졌다.
만델라는 7월로 예정된 ANC 전당대회에서 와병중인 올리버 탐보 의장으로부터 ANC의장직을 승계할 것이 확실하다.
흑인세력간의 대립,백인정부에 대한 불신 등으로 극도의 혼란을 겪고있는 가운데 취해진 이번 인종차별법폐지 조치가 나옴으로써 백인은 백인대로 무기를 들고 토지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겠다는 극우목소리도 제기하고 있어 혼미가 한동안 지속될 전망이다.<이기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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