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공소사실 애매" 검찰 "3 ~ 4%만 무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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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16일 오전 열린 김재록씨 선고 공판에서 재판장인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 문용선 부장판사는 작심한 듯 '법정 연설'에 나섰다. 통상 판결문을 그대로 읽어 내려 가는 선고 방식과 달리 문 부장판사는 구어체로 부연 설명을 곁들여 가며 김씨에 대한 검찰의 공소 사실이 대부분 부풀려졌다고 주장했다. 김씨를 '악질 브로커'나 '악질의 죄인'처럼 몰고간 것은 사실상 '인격 살인'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검찰은 "문 부장판사가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며 "관련법 조항이 애매하다는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재판부 "김씨의 범죄 여부는 애매"=검찰은 김씨가 정모씨의 부탁으로 신동아화재 인수를 돕고 1억5000만원을 받았고, 분양대행업체에 은행 대출 825억원을 알선하고 13억원을 받았다는 혐의로 지난해 4월 구속 기소했다. 이후 크라운제과로부터 화의 조기 종결 청탁과 함께 1억원을 받은 혐의와 사조산업 대표로부터 기업 인수 자금 500억원 대출을 알선해주고 대출금의 2%를 받기로 약정한 혐의로 추가 기소했다.

또 C&그룹(옛 세븐마운틴)이 우방을 인수하는 과정에서 은행 사모펀드에 인수자금 420억원을 투자하도록 알선하고 10억4000만원을 받은 혐의와 세원텔레콤에 대출을 알선해 주고 3억원을 받은 혐의로 세 번째 기소했다. 여기에 정건용 전 산은 총재에게 여행 경비로 1만 달러를 건네고 정 전 총재 퇴직 후 서울 양재동 사무실을 무상으로 사용하도록 편의를 제공한 혐의도 적용됐다.

재판부는 김씨의 혐의 가운데 신동아화재 인수 비리와 관련해서는 "정씨의 진술에 신빙성이 없다"는 이유로, 사조산업 대출 알선 혐의는 "김씨가 범행 사실을 인식하고 공모했다는 증거가 없다"며 무죄로 판단했다. 정 전 총재에게 뇌물을 제공한 혐의 가운데 사무실 무상 제공에 대해서도 "당시 정 전 총재는 공무원 신분이 아니었다"며 무죄로 봤다. 유죄로 인정한 경우는 단순한 편의 제공을 넘어 직접 해당업체와 금융기관 임직원을 중개하거나 자금조달 자체를 알선하고 그 대가로 돈을 받은 경우였다.

문 부장판사는 "금융시장이 선진화하면서 국내 회계법인들은 우리 법이 어디까지를 합법적인 영업 영역으로 보는지 고민하는 것으로 안다"며 "김씨에 대한 검찰의 공소사실도 대부분 이 애매한 영역에 속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판결이 국내 회계법인과 금융회사들에 일종의 가이드라인이 됐으면 한다"고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검찰, "법원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이 같은 판단은 검찰이 기소한 내용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채동욱 대검 수사기획관은 김씨를 구속하면서 "김씨 구속은 '서막'에 불과하다"며 "김씨가 정계와 금융당국, 금융기관 등의 실력자들에게 부정한 청탁과 함께 돈을 주고 로비를 벌인 실체"라고 말한 바 있다. 검찰 일각에서는 김씨를 법조 브로커로 알려진 윤상림씨를 능가하는 파괴력을 가진 인물로 묘사하기도 했다.

문 부장판사의 발언에 대해 검찰 관계자는 "법정 안에서 확정된 부분만 국민에게 알려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며 "검찰은 김씨를 악질 브로커로 묘사한 적이 없으며 기소 후 사건 진행에 대한 설명은 피의사실 공표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맞받았다.

검찰은 또 "문 부장판사는 김씨가 건실한 기업인으로 대부분 공소사실이 무죄로 판명났다고 했으나 실제 무죄 부분은 대출 등과 관련해 받은 돈 가운데 3~4% 정도"라며 "대부분 검찰의 기소 내용이 받아들여졌다"고 밝혔다. 이어 "특경가법상 알선 조항이 애매모호하다는 문 부장판사의 주장도 이해할 수 없다"며 "검찰은 법에 따라 적법하게 기소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문용선(49) 부장판사=1983년 25회 사법시험 합격. 공무원 뇌물 사건 등 사회지도층의 범법행위에 대해 중형을 선고해 왔다. 지난해 5월 '오포비리'사건과 관련해 뇌물을 받은 공무원과 교수에게 유죄를 선고하며 "국민 법 감정 등을 감안할 때 더 엄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사회적 요구가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박성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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