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대통령, 여권 '새판 짜기' 쉬워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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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건 전 총리의 움직임은 이명박 전 서울시장,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와 함께 2007년 대선의 가장 중요한 변수였다. 그런 그가 불출마 선언을 했다. 대선 예측의 중요 변수 하나가 사라진 것을 의미한다. 변수가 사라졌으니 예측은 더 쉬워진 걸까. 그렇지 않다. 변수 하나가 사라지면서 더 많은 돌발변수가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고 전 총리를 꾸준히 지지했던 20% 안팎의 지지층이 어디로 갈 것인가. 신창운 중앙일보 여론조사 전문기자에 따르면 고 전 총리의 주요 지지층은 '호남''노무현 대통령 지지자''열린우리당 지지자'라고 한다. 이들이 고 전 총리를 중심으로 뭉쳤는데 그가 사라지면서 범여권에 남아 있을 것인지, 한나라당 쪽으로 이동할 것인지 가늠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 김헌태 소장은 "각종 여론조사를 보면 고건 지지자들은 여당 후보가 아니라 이 전 시장, 박 전 대표 쪽이었다"며 "범여권 지지층이 더 위축될 수 있다"고 했다.

16일 SBS의 긴급 여론조사 결과에서도 고 전 총리를 지지하던 유권자의 절반 이상이 한나라당 후보 쪽으로 돌아선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디오피니언의 안부근 소장은 "고건 표는 일시적으로 이 전 시장이나 호남 출신인 정동영 쪽으로 갈 가능성이 있지만, 최종적으로 여권 후보가 정해지면 그리로 이동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고 전 총리를 북극성처럼 바라보고 항해하던 범여권의 정계개편 논의는 암초를 만났다. 범여권의 통합신당 공식은 '고건+열린우리당+민주당'의 구도였다. 고 전 총리의 빈자리를 메우지 못하면 신당 추진은 좌초하게 된다.

범여권 대선주자인 김근태 의장과 정동영 전 의장도 어려운 상황에 몰릴 것으로 보는 전망이 많다. 이명박.박근혜씨와 대등하게 경쟁해온 고 전 총리가 지지율 저하를 이유로 출마를 포기한 마당에 두 사람(둘다 지지율 5% 미만임)이 레이스를 계속할 수 있겠느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강철 대통령 정무특보는 "이제 범여권에서 강자는 없다. 춘추전국시대처럼 누구나 뛰어들 수 있다. 거기서 스타가 되고 승리한 사람이 한나라당에 맞설 범여권의 대표선수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고건 변수'가 사라지면서 노 대통령의 범여권 새판짜기가 더 용이해졌다는 관측도 많다.

범여권의 새 강자는 누가 될까. 외부 인사 중에선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이 다시 주목을 받는다. 충청권을 대표하는데다 노 대통령,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관계가 원만한 게 그의 강점이다. 다만 정치권에 뿌리 없는 고 전 총리의 낙마에 비추어 정 전 총장도 같은 길을 밟을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문국현 유한킴벌리 사장, 박원순 변호사, 강금실 전 장관도 범여권 후보군이다. 노 대통령이 관심을 갖는 '경상도 후보론'이 부상할 수도 있다. 여기엔 김혁규 의원, 유시민 복지부 장관, 이수성 전 총리가 들어 있다.

겉으론 담담한 반응이지만 한나라당 주자들의 계산도 복잡해졌다. 예측 가능했던 범여권의 유일한 강자가 없어지면서 돌발성과 의외성이 더 신경이 쓰인다는 것이다. 이 전 시장은 내심 본선에 진출할 경우 가장 유력한 경쟁자로 고 전 총리를 상정해 왔다. 박 전 대표는 고 전 총리를 한때 자신의 우군이 될 수 있다고 여겼었다.

정치 전략가들은 범여권이 약해질수록 한나라당 세력의 집권 가능성이 커지면서 '누가 출마해도 이긴다'는 의식이 퍼질 수 있다고 본다. 이런 의식이 확산되면 한나라당 주자들 사이에 원심력이 커지면서 각자 출마의 확률도 높아진다는 게 전략가들의 분석이다.

이수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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