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추적] '노무현 스트레스'에 중도 하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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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출마 기자회견 방침은 16일 오전 핵심 참모들에게 은밀히 통보됐다.

참모들은 펄쩍 뛰었다. "곧 있으면 열린우리당에서 탈당하는 의원들이 나올 테고, 한나라당에선 이명박 전 서울시장과 박근혜 전 대표 간 검증 논란이 격렬해질 것이니 상황을 좀 기다려 보자"고 반대했다. 고 전 총리는 "그런다고 상황이 나아지지 않는다"며 불출마를 강행했다.

측근들에 따르면 고 전 총리는 지지율 하락세가 이어지던 지난해 말부터 불출마를 고민해 왔다고 한다. 1일 신년 인사차 김영삼(YS).김대중(DJ) 전 대통령을 방문하고 돌아온 직후 일부 참모와 지인을 불러 의견을 구하는 등 본격적인 검토작업에 들어갔다고 한다. 불출마 결정을 내린 표면적 이유는 지지율 하락과 신당 창당 작업의 부진이다. 성명에서 그는 "당초의 기대에 크게 못 미친다는 여론의 평가를 겸허히 받아들인다"고 했다.

지지율이 한 자릿수로 내려가기 전에 물러서는 것이 '여운'을 남길 수 있다는 판단을 했을 수도 있다. 그는 열린우리당.민주당 등 현역 정치인들을 개별 접촉하며 신당 구상을 다듬어 왔다. 이른바 '고건발 정계 개편'을 추진한 것이다. 월급 사장 대신 오너가 되는 길을 꿈꿨다.

하지만 '오너의 길'은 순탄치 못했다. 열린우리당의 통합 신당 논의가 노무현 대통령의 공격에 흔들리면서 암초에 부닥쳤다. '한 배'를 타기로 약속했던 의원들이 이런저런 구실을 대며 발을 뺐다.

최근 사석에서 "(의원들이)나더러 5년 뒤까지 AS(애프터서비스)를 하라고 하는데…. 어떻게 1년 뒤까지는 해보겠지만 5년 뒤를 어떻게 약속할 수 있겠느냐"며 폭음했다고 한다. 또 '친(親)고건파'로 불리는 의원들을 거명하며 "나를 이용하려고만 든다"고 불만을 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고 전 총리는 노 대통령에게 상당한 부담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한 측근은 "개헌 제안 등 노 대통령이 대선에 개입할수록 진보.보수 대결이 공고해지고, 그러다 보면 중도를 표방한 세력들은 설 자리가 없어질 것 아니냐는 우려를 많이 했다"고 전했다. "고건 총리를 기용한 것은 잘못된 인사"라고 발언한 노 대통령과의 갈등 구도가 그를 괴롭혔다고 한다.

다른 측근은 "노 대통령의 잇따른 공격은 고 전 총리에게 난폭한 협박처럼 느껴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고 전 총리는 자신이 '제2의 이인제' '제2의 정몽준'이 돼선 곤란하다는 생각도 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가 불출마를 결심한 데는 '건강 문제'도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측근인 강홍빈 전 서울시 행정부시장은 "6개월 전 폐렴 진단을 받고 통원치료를 해왔는데 그때 불출마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전했다. 당시 고 전 총리는 "내가 (국정 운영을)해봐서 아는데 국정 운영은 체력전이다. 최상의 컨디션으로 해도 될까 말까"라며 접을 수도 있다는 뜻을 비췄다고 한다.

고 전 총리는 이날 불출마 회견을 가로막는 지지자들에게 "거의 완치 단계에 있지만 6개월 전에 내시경 검사를 한 적도 있다. 6개월 전부터 지켜보고 내린 결론"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해명에도 불구하고 주변에선 여전히 "너무 빠른 중도하차에는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니냐"는 얘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이에 대해 한 지인은 "돌다리도 건너보고 건넌다는 말이 있는데 고 전 총리는 건널 때뿐 아니라 돌아올 때도 다리가 튼튼한지 확신이 서야 비로소 건너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모험을 꺼리는 성격과 오랜 관료 생활에서 다져진 지나친 신중한 스타일 탓이란 지적이다.

이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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