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권형 개헌' 말은 꺼냈는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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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분권형 대통령제는 한나라당으로선 쉽게 뿌리치기 어려운 유혹이다. 당내에 확실한 차기 대권 주자가 없는 상황에서 대통령 중심제를 유지했을 경우 집권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통령의 권력을 분점하는 시스템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게 한나라당의 형편이다.

내년 4월 총선 전에 분권형 대통령제로의 개헌이 이뤄지면 한나라당에겐 행정권을 장악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긴다. 총선에서 승리하면 내치(內治)를 맡을 책임총리를 배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당내에서 개헌에 대한 공감대가 완전히 형성된 상황은 아니다. 하지만 개헌을 한번 추진해 보자는 분위기는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당내 세력을 가진 서청원 전 대표, 홍사덕 원내총무, 강재섭.김덕룡 의원 등이 뜻을 모은 데다 최병렬 대표도 원칙에 동의하고있다.

崔대표는 결국 적절한 시점에 가세할가능성이 크다. 崔대표는 12일 徐전대표 등과의 회동에서 내년 1월을 개헌안 발의 시점으로 제시했다는 후문이다. 이는 대선자금 정국을 일단 넘긴 다음 개헌 문제를 꺼내자는 것이다.

그러나 12일 회동에서 은밀히 논의한 내용이 알려진 만큼 개헌 추진 작업이 앞당겨질 가능성이 있다. 개헌을 위해선 국회 재적의원 과반수 또는 대통령의 개헌안 발의→대통령 공고→국회 의결(재적의원 3분의2 이상)→국민투표 등의 절차를 밟아야 한다. 개헌을 위한 물리적인 시간은 최대 1백10일 정도 소요되지만 정치권이 하기에 따라선 얼마든지 단축할 수 있으므로 총선 전 개헌은 충분히 가능하다.

그럼에도 개헌이 과연 총선 전에 이뤄질 것인지는 미지수다. 개헌은 정치권에 공감대가 형성되고, 여론이 뒷받침해 줘야 가능하다. 한나라당 대선 예비 주자인 손학규 경기도지사.이명박 서울시장 등이 개헌에 반대할 경우 개헌 작업엔 진통이 따를 것이다.

孫지사는 "다음 대선 전까지 개헌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두사람 모두 국회 밖 인사라는 점 때문에 개헌 논의를 막아내기는 물리적으로 어렵다는 게 중론이다.

문제는 명분이다. 명분이 있어야 국민투표의 벽도 넘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개헌이 민주화라는 명분을 지녔던 데 반해 이번의 개헌 논의는 그 정도의 명분을 확보하고 있지 못한 게 사실이다. 결국은 노무현 대통령의 힘에 제약을 가하자는 것이다. 이 때문에 절충의 여지도 없지 않다. 盧대통령이 사실상 개헌의 효과를 갖는 방안을 타협 카드로 제시할 가능성이 없다 할 수 없기 때문이다.

盧대통령은 취임 전 지역정당 구도 타파를 위해 중대선거구제를 제안했고, 그 경우 내년 총선에서 다수 의석을 확보한 당에 총리직과 각료 임면권을 주겠다고 밝힌 바 있다. 그래서 한나라당이 개헌을 추진하다 잘 안 되면 盧대통령과 타협을 할지도 모른다. 그때는 현행 소선거구제가 도농(都農) 복합선거구제(도시는 중대선거구제, 농촌은 소선거구제)로 바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상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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