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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린 가락에 세계가 얼쑤|김덕수패 사물놀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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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천하의 음치라도 그들이 울려대는 북·장구·꽹과리·징 소리에 일단 휘감기면 어느덧 어깨를 들썩이며 손장단을 맞추다 결국『얼쑤』『좋다』하고 외치지 않을 도리가 없다고들 말한다.
김덕수패 사물놀이.
「신을 부르는 소리」「세계를 두드리는 한국인의 영혼과 맥박」등 이들이 펼치는 무아경의 소리잔치에 대한 국내외의 평판은 지나치게 현란한 듯하다. 그러나 막상 그 신명의 한복판에 직접 빠져들고 난 사람들은 가슴이 탁 트인 듯 환해진 표정으로『좀더 적절한 찬사가 없을까』 『한국에 이렇게 훌륭한 음악이 있는 줄 미처 몰랐다』고 찬탄한다.
이런 사물놀이패가 민족분단의 벽을 뛰어넘어 통일을 여는 남북교류의 물꼬를 트는데 앞장선 것은 하나의 조국을 바라는 모두를 위해 참 당연하고도 다행스런 일이다. 이들은 90년8월 일본 오사카 야외공연장에서 재일동포단체인 민단과 조총련이 공동 주최한「조국은 하나다」무대에 올라 남녘예술인으로는 처음으로 북녘예술인과 나란히 해외에서 공연했다.
지난해 10월에는 평양에서 열린 범민족통일음악회에 서울전통음악연주단의 일원으로 참가했다. 범민족통일음악회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기 위해 판문점을 통과하기 전 그들은 사물놀이판이라도 질펀하게 벌여 뜨겁게 배웅하는 개성시민들과 한바탕 더 어우러질 수 없음을 무척이나 아쉬워했다. 북녘 문화예술인들도 마찬가지 심정을 털어놨다.
우리네 핏속에 흐르는 사물 가락과 장단이 김덕수패를 통해 남북만남의 자리에서 쏟아져 나오는 순간 반세기에 걸친 민족분단의 골이 제아무리 깊어도 우리는 결국 갈라져 살 수 없는 한 핏줄임을 새삼 확인하던 감동이 너무도 가슴 벅찼던 까닭이다. 올해도 지난5월 일본 쓰루가에서 열린「환일본해 국제 예술제」를 계기로 또 한차례 이뤄진 남북예술의 만남에 김덕수패가 물론 끼어있다.
굳이 머리로 생각하지 않더라도 대뜸 가슴에 와 닿는 사물놀이의 울림은 휴전선뿐 아니라 지구촌 구석구석의 국경들도 거뜬거뜬 넘어 다니며 숱한「사물노리안(Samulnorian)」을 만들어내고 있다. 사물노리안이란 사물놀이 공연에 열광하는 광적 애호가들을 일컫는 신조어.
이들은 사물놀이를 그저 보고 들으며 즐기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모임을 만들어 스스로 꽹과리·장구·북·징을 배워 신명껏 두드리며 환호하기 일쑤다. 김덕수패가 지난 10여 년간 유럽 각국과 일본·미국 등 해외에서 가진 워크숍 덕분에 이 한국의 소리와 만나게된 사물노리안 만해도 줄잡아 1천명 가량.
그 중에서도 수전 삼스탁씨(31)는 8년째 만사 제쳐놓고 김덕수패의 사물놀이판을 쫓아다니면서 매니저역할까지 맡아 이들을 뒷바라지할 정도의 사물놀이숭배자(?)다.
사물놀이가 처음 생겨난 것은 지난 78년. 소극장 공간사랑 주최「전통음악의 밤」에 김덕수씨(39)등 4명의 젊은이가 충청·경기지역의 웃다리 풍물을 네 가지 전통악기로 연주한 것이 대성공을 거뒀고, 결국 이 같은 공연양식이「사물놀이」란 이름을 얻게됐다.
지금까지 이들이 20여개국을 누비며 펼친 사물놀이 공연은 6백여회. 국내 공연횟수도 그 쯤된다. 쇄도하는 해외공연 요청을 다 받아들일 수 없어 이제는 그 규모·성격·시기·의의·연주료를 비롯한 공연조건 등을 면밀히 따져가며 응한다. 사물놀이 본고장인 한국 청중들에게도 소홀할 수 없는 만큼 국내와 해외공연비율을 가급적 5대5정도로 유지하려는 나름의 원칙 때문이다.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이름조차 없던 사물놀이. 이제는 그 연주단체가 셀 수없이 많아져 전국의 대학이며, 각 직장노동조합 치고 사물놀이패가 없는 곳은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피를 들끓게 만드는 사물놀이의 힘찬 소리는 모임의 열기를 고조시키는데도 제격이어서 반 외세·민주화를 외치는 시위현장의 감초가 됐다.
선풍적 사물놀이 붐을 일으킨 원조답게 이들은 공연으로 그치지 않고 사물놀이를 좀더 널리 보급하기 위해 이미 15가지가 넘는 음반·교육용 비디오테이프·교칙본 등을 국내외에서 펴냈다.
요즘은 사물놀이 전문연주단체도 상당수 생겨났고 사물놀이 강습도 곳곳에서 벌어지지만 공연장과 강습장에서 원조 김덕수패를 직접 만나야겠다는 사물놀이 안이 끊이지 않아 이들을 잠시도 쉬지 못하게 한다.
무엇이 그 많은 국악분야에서 사물놀이, 그 중에서도 굳이 김덕수패를 찾게 만드는가. 음악평론가 한명희교수(서울시립대)는『우리고유의 토속적 리듬이 순수한 원시적 본능을 일깨우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언제 어디서나 청중의 분위기며 욕구에 따라 얼마든지 다채롭게 구사할 수 있는 장단의 즉흥성도 청중을 휘어잡는 매력』이라고 설명한다.
꽹과리의 쇳소리가 날카로운 배음을 퍼뜨리며 빠른 속도로 음을 쏟아내는가 하면 북의 가죽소리가 부드럽게 쇳소리를 달래며 김싸는 식으로 네 가지 타악기가 서로 어우러지며 청중의 가슴을 자유자재로 옥죄고 풀어주는 사이 현대인을 짓누르는 스트레스는 어느새 말끔히 씻겨나간다.
특히 김덕수패의 경우는 이 시대의 마지막 남사당 후예로서 타고난 예인기질에다 각양각색의 청중들과 호흡해본 수많은 경험까지 보태져 신들린 무당처럼 청중을 능란하게 사로잡는다. 어느 한순간도 허술한데 없는 가락과 장단의 조화속에 긴장과 이완을 거듭하는 사이 차츰 도취된 청중을 어느덧 절정으로 휘모는 것이다. 김덕수패가 땀이 번들거리는 얼굴에 읏음을 머금고 인사하는 모습을 보는 순간 청중들 자신도 기분 좋은 땀을 흠씬 흘리고 난 듯 상쾌한 기분을 맛보게된다.
풍물가락을 현대감각에 맞게 재정립시킨 사물놀이가 국악의 새로운 장르로 자리잡으면서 현재와 같은 민족성·대중성·세계성을 동시에 획득할 수 있었던 배경을 김덕수씨는 이렇게 설명한다.『직업 연주인으로 살아남기 위한 자구책이 필요했다.』
우리 것을 부끄럽고 천하게 여기는 풍토, 거리굿마저 금지시킨 60년대의 관혼상례법, 이런 환경에서 풍물이나 굿처럼 생활 속에 살아 숨쉬던 공연문화를 이어가려면 그 정수를 요즘 청중들의 입맛에 맞게 다듬어 무대위에 올려놓을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또 김덕수패의 창단 멤버로서 꽹과리와 소리가 일품인 이광수씨(39)는『그 알맹이는 누가 뭐래도 우리 것이기 때문에 애초부터 한10년만 제대로 갈고 닦으면 누구나 좋아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고 말한다.
게다가 그 뿌리가 튼튼하며 사물악기 특유의 포용성 때문에 재즈·서양식 오키스트라·국악관현악 등 어느 분야의 음악과도 독특한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자랑한다.
이들의 얘기는 우리 전통문화예술의 각 분야를 오늘에 되살려 지구촌 구석구석에 심는 일에 관심있는 모든 사람들이 곰곰 되씹어볼 일이다.「우리 것」을 현대화·대중화·세계화 시킬 수 있는 핵심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김경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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